“내가 조선의 국모다” 낭인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인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 낭인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인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 낭인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인 명성황후
한 달 만에 다시모인 편집위원들은 지난 강화도 취재에서 확인한 흥선대원군과 병인양요에 이어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를 풀어보기 위해 황후의 생가가 있는 여주로 출발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여 준 두 사람. 두 사람의 일생은 꺼져가는 조선 왕실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때마침 여주 일대는 도자기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광주,여주,이천은 조선시대 관요가 자리한 곳으로 지금까지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신륵사의 통일신라시대 다층전탑 앞에서 바라본 남한강의 아쉬운 모습도 이번 취재에 담았다.
국모의 고향 여주
여주는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경기도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남한강이 남동쪽에서 북서로 관통한다. 남한강은 예로부터 수상운송에 유리하여 여주를 미곡 집산지로 발전시켰다. 세종대왕릉과 고달사지, 신륵사 등 유서 깊은 사적과 문화재가 산재해있다. 여주읍 능현리에 위치한 명성황후의 생가는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있었다. 1995년부터 복원 작업에 착수하여 2008년 일대를 사적지로 완성했다. 생가는 황후가 8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이후 한양으로 옮겨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살던 감고당도 이전 복원하였다. 명성황후 기념관도 함께 건립되어 파란 만장 했던 왕후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생가 주변은 조선시대 민가도 함께 복원되어, 당시 서민들의 시대상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황후의 탄생
명성황후의 집안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황후의 아버지 여흥 민씨 유중의 자손 이다. 아버지 민치록은 6대조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며 여주에서 생활하였다. 철종조 1851년 음력 9월 25일 부인 한산이씨와의 사이에서 황후의 운명을 가진 딸 자영을 낳는다. 그러나 아버지 민치록은 황후가 8살 되던 해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후 서울로 이사한 황후는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양가의 규수로 착실히 성장해 나간다.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대원군은 안동 김씨 등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정치적 영항력이 적은 양가의 규수를 찾고 있었다. 대원군의 부인의 추천으로 대원군의 눈에 띄어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황후로 책봉되어 대궐로 들어온 어린 민자영은 궁궐안의 여러 서적을 탐독하며 전통과 현대의 다양한 식견을 갖춘 황후로 성장한다. 어려운 가세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황후의 삶은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원자와 공주를 출산하였지만 바로 잃는 슬픔을 이겨내야 했고, 시아버지 대원군의 실정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고종 황제의 내조도 황후의 몫이었다.
국모의 역할 그리고 낭인의 칼
총명함으로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황후는 마침내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된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의 문물개방은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백성들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한다. 반면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높아만 간다. 1882년 결국 신식군대인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한 구식군대 무위영의 군사들이 난을 일으킨다. 민씨 일족과 황후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은 다시 등장하고, 황후는 변장을 한 채 피신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다시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나라 텐진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써 속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다. 청나라의 개입은 대원군을 청나라로 호송을 하였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시기 황후는 보다 많은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황후는 조.일 수호통상, 신사유람단 일본파견, 청나라 영선사 파견,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이름을 하사하는 등 조선의 발전을 위해 많은 외교적 업적을 남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개혁을 구실로 조선의 왕권과 국권을 침탈하기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시도한다. 이에 황후는 ‘以夷制夷(이이제이)’ 적으로 적을 친다는 뛰어난 국방 외교전술을 강구한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뛰어난 외교력으로 러시아, 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 "삼국간섭"을 성사시킨다. 당황한 일본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엄청난 만행을 계획한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실행한다. 황후는 일본의 자객 다카하시겐지의 칼에 의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 대원군과 사사건건 정쟁을 일으키는 부정적 이미지로 조작한다. 그러나 황후는 죽음 앞에서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의연한 국모였다. 우리 모두가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부분이다.
남한강의 수호사찰 신륵사
신륵사는 명성황후 생가로부터 자동차로 약 10여분 떨어진 봉미산아래 남한강변에 위치한 고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 1376년(우왕 2)에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세종대왕릉)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고려 고종 때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남한강가의 수해를 부처님의 원력으로 막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신륵사는 많은 불교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강가 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다. 고려시대 건립된 이탑으로 인해 신륵사는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상의 부도탑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또한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이외에도지금은 해체 수리중인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다. 신륵사의 또 다른 자랑은 바로 남한가의 수려한 풍광을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방송사의 애국가 배경화면으로 쓰이기도 했던 정자는 보수 공사를 해 올라가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편집위원들이 다층전탑 앞에서 바라본 남한강의 풍경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굽이쳐 흐르던 강은 4대강 여주보 사업으로 많은 변화를 보였다. 건너편 강변은 미사리 조정 경기장을 옮겨 놓은 듯 차가운 콘크리트로 벽으로 덮어두었고, 상류 쪽 모래톱은 거의 사라져가는 모습이었다. 아쉬움에 한참을 처다보았지만, 이미 인간의 손에 사라져버린 자연은 돌이킬수 없었다. 예전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굿굿이 자리를 지키는 부처님은 아직 계시니 그걸로 위로를 삼으며발길을 돌렸다.
지금 여주는 축제 중이다. 경기도가 추최하는 세계도자비엔날레와 여주진상품 축제가 열리고 있다. 편집위원들은 겉으로 화려한 축제보다는 여주가 가진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는 것을 권했다. 국모의 고향이자, 신륵사의 고장 그리고 사라져가는 남한강을 우리 교도들이 찾아 보기를 권했다.
취재= 편집위원 이인성,박묘정,최영아 통신원 벽룡사 양재범
정리= 김종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