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남쪽, 제일의 명산
설악산 누구나 한번은 가 보았던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웅장한 바위들이 탐방객 압도하고, 안으로는 굽이굽이 계곡이 숨은 천해의 비경을 간직한 곳이다.
높이 1,707.86m.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백두대간의 허리부분으로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雪岳이란 이름의 유래는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가위에 덮이기 시작한 눈이 하지에 이르러야 녹는다 하여 설악이라 불린다고 하였다. 또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이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밖에 설산(雪山)·설봉산(雪峯山)이라고도 불렀다.
설악산은 태백산맥 연봉(連峯) 중의 하나로 최고봉인 대청봉(大靑峯)과 그 북쪽의 마등령(馬等嶺)·미시령(彌矢嶺), 서쪽의 한계령(寒溪嶺)에 이르는 능선을 설악산맥이라 하며 그 동부를 외설악, 서부를 내설악이라 한다. 또한 동북쪽의 화채봉(華彩峯)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화채릉, 서쪽으로는 귀떼기청봉에서 대승령(大勝嶺)·안산(安山)에 이르는 서북릉이 있고, 그 남쪽 오색약수(五色藥水)터·장수대(將帥臺)일대를 남설악이라 부른다.
외설악의 북부에는 쌍천(雙川)이, 남부에는 양양 남대천(南大川)이 흘러 동해로 들어가고, 내설악의 북부에는 북천(北川)이, 남부에는 한계천(寒溪川)이 서쪽으로 흘러 북한강의 상류를 이룬다.
지질은 화강편마암·결정편암·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차별침식 및 하식작용으로 지금과 같은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경관이 만들어졌다.
금강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밀려 역사적으로 주목 받지는 못했지만,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봉정암과 오세암, 백담사, 신흥사, 낙산사 등 많은 불교 유적과 암자들이 있다.
설악의 중심사찰 신흥사와 삼성각
설악산에 있는 대표적인 사찰로는 내설악의 백담사와 외설악의 신흥사를 들 수 있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한계리(寒溪里)에 지은 이후 잦은 화재로 설악산 안의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는 외설악의 권금성을 앞에두고 뒤로는 울산바위가 호위하는 신흥사가있다. 이 사찰은 조선 인조 때 고승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등이 진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한 향성사(香城寺)의 자리에 창건한 절이다. 지금은 조계종 제3교구 교구본사이다.
신흥사 삼성각은 극락보전 뒤편으로 자리한다.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칠성단을 중심으로 좌. 우로 독성과 산신을 모셨다. 설악산과 신흥사의 역사성을 보고 조선말엽이나, 일본 강점기에 조성 되었을 것으로 잔뜩 기대를 품고 들어선 삼성각 안에는 너무도 밝은 색상의 산신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었다.
화기(畵記)를 보니 불기 2531년, 서기 1987년에 조성된 탱화였다. 유난히 금박이 도드라져 보이는 산신탱은 소나무와 폭포,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좌측에는 호랑이와 우측으로 세 명의 동자가 시봉을 드는 모습이다. 다른 사찰의 산신탱과 비교되는 부분은 태극을 청, 홍으로 분리하여 엎어놓은 모양의 눈과 상투의 장식부분이 금박으로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동자가 든 지팡이에 매달린 호리병도 금박으로 장식한 뜻은 무엇인지? 시주를 위한 방편인지 아니면 다른 깊은 뜻이 있는지는 기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현대 산신탱에 대한 연구는 아직은 미흡한 편이라 앞으로 학자들의 연구가 기대된다.
설악산 사찰에 전해오는 설화
백담사 산신 설화
백담사(百潭寺) 창건 이래 지금의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1783년까지 무려 일곱 차례에 걸친 화재를 입어 그때마다 사찰을 옮기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나타난 백발노인이 일러준 대로 대청봉에서 절까지 물웅덩이(潭)를 세어 백 번째가 되는 현재의 자리에 절을 세우고 ‘백담사(百潭寺)’라 이름 지은 후부터 좀처럼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관세음보살 영험설화를 간직한 오세암
산신의 계시로 사찰을 중창한 출가한 백담사, 뒤편으로 마등령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조선조 최고의 명문장을 자랑한 금오신화의 저자 매월당 김시습과 만해선사가 머물며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참배객과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암자다.
원래 오세암은 관음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세음보살 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스님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觀音庵)을 오세암(五歲庵)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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