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불교와 3.1 운동불교인사이드
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2. 3. 6. 14:26

특집-불교와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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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3.1운동


조선 독립의 의지로 전국의 불자들이 하나 되었던 그 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라는 제국주의에 온 백성이 분연이 일어나 항거한 3.1일 운동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만큼 3.1운동은 온 겨레가 공동으로 발원하고 저항한 거대한 민족사의 혁명이었다. 또한 그 운동의 주역으로 불교는 가장 먼저 일어나 선봉에 섰다.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가로 백용성 스님, 한용운 스님 등은 3.1 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민족의 대표였다. 3.1운동 92주년을 맞아 두 선사의 삶을 통해 불교계와 3.1운동을 돌아보고자 한다.

민족대표 33인과 대각사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에 위치한 ‘대각사’는 한국 근세 불교의 흐름에 있어 안국동 선학원과 더불어 가장 역사 적인 장소다. 일본 강제 통치하에 흩어진 조선불교의 중흥을 위한 대각교 운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용성스님 나이 47세 되던 해 스님은 산중 수행을 잠시 접어두고 속세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통한 중생구제에 나서기로 작정한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민족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구제이고, 먼저 불교의 대중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님은 1911년 홀연 상경하여 우선 신도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고,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려했다. 그 해 4월 스님이 종로구 봉익동(鳳翼洞)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하면서 본격적으로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스님이 주창한 대각교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것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심화되어 가는 불교의 왜색화를 막고자함이 그 첫째 목표이고, 또한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각교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대중불교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소이자 수행장이었다. 한용운 스님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선생과 상의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1919년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동참한다. 당시 천도교의 최린·기독교의 이승훈 등과 함께 3·1운동을 앞장서 추진하던 한용운 스님은 2월 25일경 선생을 대각사로 찾아왔다. 한용운 스님은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분연히 일어서 독립운동을 하려 한다고 말하니, 용성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를 투합한다. 평소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중생구제의 일환으로 여겨오던 용성스님은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스님은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천도교·기독교 등 다른 종교계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스님과 민족대표들은 일경에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 조사를 받는다. 스님은 일본인 판사가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이 취지에 찬성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떳떳하게 대답하였다. 또 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스님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 마음으로 좋아서 찬성하였다”고 하였다. 서슬퍼런 일경의 심문 앞에서도 조선독립에 대한 의지를 호국불교의 신념으로 표출하였다. 스님은 일제에 의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 민족 운동

만해 한용운 스님의 삶은 한마디로 불교의 유신과 민족 독립을 위한 구도의 역정이었다. 어려서 동학혁명에 가담하였고, 만주에서 광복운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또한 승려로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한용운 스님은 민중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유심’지를 운영하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 린으로부터 계획을 듣는다. 또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스님은 즉시 대각사 주석하며 불교 개혁과 조국의 독립을 발원하던 용성스님에게 거사계획을 알린다. 불교계 적극적인 참여를 권유하여 용성스님과 나린이 민족 대표 33인에 서명한다. 한용운 스님은 육당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하자, 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더불어 공약삼장을 추가하여 조선 독립의 결의와 정당성을 더 강하게 표현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한용운 스님은 33인을 대표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만방에 표한다. 일경에 체포된 이후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신간회(新幹會)운동과 조선불교청년동맹을 통한 불교청년운동을 강에 앞장선다.

전국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중앙학림(현 동국대) 청년불자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의 참가로 불을 지핀 독립운동은 불교계 청년들에게 이어진다. 불교계 종립학교였던 중앙학림(현 동국대) 학생들은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불교계에 배포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를 기점으로 학생들은 항일투쟁에 직, 간접 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1918년부터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한용운 스님은 는 1919년 2월 28일 10,000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수받는다. 그날 밤. 평소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 학생들을 자신의 계동 집에 모이게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봉신을 비롯하여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 이었다. 이들 10명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다. 한용운스님은 학생들에게 “서산(西山)과 사명(泗溟) 양 대사의 법손임을 굳게 명심하여 불교 청년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우리 불도가 다른 교도들의 앞장을 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비장한 격려를 하였다. 만해 스님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여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한다. 학생들은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를 하게 하였다.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3·1운동의 전개는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를 책임지고,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를,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를, 정병헌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에 있은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하여 지역별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한다. 이로 인해 중앙학림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강제폐교까지 당한다. 불교의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과 불교 혁신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 독립선언서를 가슴속 깊이 품고 전국의 사찰로 떠나던 불교 청년들은 이후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해방이후 한국불교와 동국대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다.

취재,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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