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이룬 불국토.
8월 경주. 한여름의 태양은 고도의 한낮을 달구었다. 대전이남 지역은 올해 유난히 더운 날씨와 가뭄으로 열대의 기후를 경험해야 했다. 거리의 가로수와 잡초마저 말라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불교 유적을 품고 있는 남산은 여름의 더위와 추위를 모두 견디어 내고 천년을 지켜오고 있었다.
남산의 위치와 역사적 배경
경주 남산(이하 남산)은 경주시 인왕동 등 4개 동 및 내남면 용장리를 포함한 총면적 1,813만 4,645㎡로 골짜기 마다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품고 있다. 일명 금오산(金鰲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남산은 일반적으로는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高位山)의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 전체를 통칭해서 남산이라고 한다. 금오산의 정상의 높이는 466m이고, 남북의 길이는 약 8㎞, 동서의 너비는 약 4㎞이다.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의 형상이다. 북으로 뻗어 내린 산맥에는 상사암(想思巖)· 해목령(蟹目嶺)· 도당산(都堂山) 등의 봉우리가 있고, 남으로 뻗은 산맥에는 높이 495m의 고위산이 있다.
남산의 지세는 크게 동(東)남산과 서(西)남산으로 나뉜다. 동남산 쪽은 가파르고 짧은 반면에, 남산 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긴 편이다. 서남산의 계곡은 2.5㎞ 내외이고, 동남산은 가장 긴 봉화골[烽火谷]이 1.5㎞ 정도이다. 모두 34개의 계곡이 있고 불적은 고루 분포 한 편이나 동남산 쪽보다는 서남산 쪽이 훨씬 많은 유적이 있다.
남산은 신라의 시작과과 끝을 함께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의 무대는 나정(羅 井)이고,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화려한 연회 도중 견훤의 공격을 받아 왕조의 운명을 마감한다.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은 신라인의 산악숭배와 더불어 부처님이 상주하는 불국토로 남산을 가지력이 뛰어난 산으로 숭배한다. 이번 글에서는 남산을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누어 주요 불교 유적과 유물을 만나보자.
동(東)남산의 유적
남산은 남북으로 약 8KM 뻗어있다. 산의 동쪽은 ‘토함산’을 마주하고 서쪽은 ‘망산’을 마주하고 북쪽 끝은 왕궁인 월성을 바라본다. 여기서부터 대표적인 유적과 유물들을 살펴보자.
왕궁이 자리했던 월성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먼저 만나는 것이 ‘상서장’(上書莊)이다. 상서장은 신라의 학자 최치원이 머무르던 곳이다. 왼편으로 도당산이 서있고 그 아래 천관사지가 있다. 김유신과의 사랑으로 유명한 천관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지금은 논으로 변해 탑재나 주춧돌 등 유구들만 남아있다.
상서장에서 남산리로 가는 문천가에 양지마을이 있고, 그 동편에 절터가 있다. 주춧돌 등의유구의 규모로 상당한 규모의 사찰로 추정된다. 이 사지에는 목탑지가 남아있는데, 그 규모로봐서는 황룡사 구층목탑지, 망덕사목탑지, 사천왕사목탑지 등과 함께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목탑 유적이다.
왕정골 입구 남천(南川)의 남쪽 기슭에는 인용사지(仁容寺址)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친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위하여 지은 절이다. 김인문이 당나라와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신으로 갔다가 옥에 갇혀 있었을 때,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으로 김인문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다. 당나라에서 석방된 김인문이 귀국하던 도중 바다에서 죽자, 그 관음도량을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바꾸어 조성하고 명복을 빌었다. 이 절터에는 두 탑의 잔재가 남아 있다. 동쪽 탑은 첫 층의 옥개석(지붕돌)과 2층의 탑신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탑 자리만 남아 있다. 이 밖에 팔방(八方) 대좌의 지대석(地臺石)이 발견되었다.
인왕리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면 보물 제198호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이 있다. 부처 골짜기의 큰 바위에 깊이 1m 정도의 되는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
불상의 머리는 두건을 덮어쓴 것 같은데 이것은 귀 부분까지 덮고 있다. 상호는 둥그렇고 약간 숙여져 있으며, 부은 듯한 눈과 깊게 파인 입가에서는 내면의 미소가 번지고 있다. 이런 점은 인왕리석불좌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이다. 양 어깨에 걸쳐입은 옷은 아래로 길게 흘러내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까지 덮고 있는데, 옷자락이 물결무늬처럼 부드럽게 조각되어 전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불상으로 인하여 계곡 이름을 부처 골짜기라 부르게 되었다.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탑곡마애조상군(塔谷磨崖彫像群)은 탑골 입구에서 옥룡암(玉龍庵)으로 오르면 암자의 뒤편으로 거대한 암석에 있다. 암석의 가장 높은 북면은 높이 9m, 너비 6m이다. 동면은 높이 7m, 너비 12m이며, 서면은 높이와 너비가 6m 정도이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신인사(神印寺)란 절이 있었던 곳이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마애조상군의 만다라(蔓茶羅)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밀법승 명랑버사의 신인종계통 사찰의 조각임을 알 수 있다.
남쪽의 큰 암석에는 목조 건물의 형태가 남아 있고 또한 탑재들이 흩어져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남쪽을 향한 바위 면에는 삼존불(三尊佛)과 독립된 보살상(菩薩像)이 있고, 동쪽을 향한 바위 면에도 중심이 되는 불상과 보살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이 있다. 그 옆으로 여래상과 보살상이 있다. 그러나 모두 마멸이 심하여 자세한 조각 수법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북쪽 면 바위에는 9층과 7층의 쌍탑(雙塔)을 배치하고, 서쪽 바위 면에는 보리수와 여래상이 있다. 이렇게 불상(佛像), 비천(飛天), 보살(菩薩), 탑(塔) 등 화려한 회화적 조각 수법으로 만다라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마애 조상이다.
현재의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의 뒤쪽 골짜기를 미륵골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보리사(菩提寺)와 보물 제136호인 미륵곡석불좌상이 있다.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석불좌상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에서는 은은하게 내면적인 웃음이 번지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힘없이 축 늘어진 느낌이며, 군데군데 평행한 옷 주름을 새겨 넣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다소 연약해 보인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光背)는 매우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특히 광배 뒷면에는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불을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형식은 밀양 무봉사와 경북대 박물관 소장 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이다.
동(東)남산 등산코스 중 남산동에서 칠불암까지의 등산로를 한 시간 반 정도 오르면 칠불암에 이른다.
칠불암(七佛庵) 큰 암석에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 등 7개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에 칠불암이라 하였다.
국보 제3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칠불암마애석불은 원래 보물 제200호로 지정되었으나 유물의 사료적 가치를 재평가해 2009년 9월 2일 국보로 승격 되었다. 위엄있는 모습에 나발(머리카락이 달팽이 모양으로 동글게 모여있는 모습)과 삼도(목 부분의 3겹 주름 모양)가 선명하다.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은 감로병을 들고 왼손을 치켜든 모습이고, 왼쪽의 협시보살은 왼손에 천화(天花), 오른손에 연꽃을 쥐고 있다.
아미타삼존불로 추정되며, 곡선의 표현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서 당나라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사방불은 조각수법이 삼존불에 비하여 떨어지는데, 동면의 약사여래 이외에는 단정적으로 불상의 명칭을 확정짓기는 곤란하다. 이 주위에는 석탑의 지붕돌·석등대석 등 유물이 남아 있다.
칠불암 뒤의 높이 솟은 바위에 보물 제199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에, 한 손에는 연꽃을 들고 한 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얹었고, 그 곳에 장식된 영락은 어깨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서(西)남산의 부처님
고위산과 금오산 사이의 계곡에는 남산에서 가장 깊고 넓은 계곡이다. 만물상(萬物相)이라 불릴 만큼 바위들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유구와 유적으로 추정컨대 약 18개 정도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름이 전하는 곳은 용장사 한 곳 뿐이다.
용장사의 약사여래상과 불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안치되어 있으며, 삼층석탑은 보물 제186호로, 석불좌상은 보물 제1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층석탑은 용장사터의 동쪽산맥 위에 솟아 있으며, 높이는 4.5m의 작은 탑이다. 신라탑의 전형으로 석가탑의 양식을 답습하였다. 특이한 점은 하층기단이 없고 직접 자연암석에 상층기단을 세운 점이다. 이것은 지형적 특성과 조화를 표현한 신라인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목조건축물의 주춧돌을 가공하지 않은 평평한 바위를 쓰고, 그 위에 기둥을 올리는 ‘그랭이’ 기법으로 발전한다.
마애여래좌상은 삼층석탑 밑의 10m 암벽에 결가부좌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기법이 사실적이면서도 밑 부분의 연꽃무늬 때문에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불상이다. 높이 1.9m, 너비 1.1m이다.
보물 제187호인 여래좌상은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라고도 한다. 하대석은 직육면체인데, 윗부분을 다듬어서 둥글게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원형대좌를 만들고 결가부좌인 불상을 안치하였다. 머리 부분이 없어진 것을 1923년 복원하였다. 전체높이는 4.6m이다.
이 용장사에는 신라 경덕왕 때의 고승인 태현(太賢)과 조선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유가(瑜伽)의 대덕 태현은 용장사에 살면서 그 절에 있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丈六像)을 예배하였다. 태현이 불상을 예배하면 불상도 또한 태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리우는 김시습은 만년에 이 곳에 머무르면서 ≪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용장골에는 18곳의 절터가 있고, 산꼭대기에는 자연석에 복련화(覆蓮華)를 새긴 대좌 1기와, 비를 세웠던 비대석 1기, 삼층 폐탑 등이 있다.
약수골의 입구에는 사적 제222호인 경애왕릉이 있다. 포석정에서 놀이를 하다가 후백제 견훤(甄萱)에게 죽음을 당한 경애왕의 무덤으로서, 능 둘레는 32m이며, 신라왕릉의 규모로는 제일 작은 것이다. 직사각형의 석재로 호석(護石)을 쌓고, 다시 오각형으로 된 돌기둥을 둘렀으나 흙에 파묻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남산 답사여행과 등산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삼릉골에서 금오봉까지 불적들을 살펴보자.
삼릉골은 사적 제219호로 경명왕릉·신덕왕릉·아달라왕릉 등 세 능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리라고 불린다. 총 11곳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산으로 올라가면 석불좌상과 마애관음보살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다.
머리가 없는 석불좌상은 높이 1.6m, 무릎너비 1.56m로, 1964년 동국대학교 학생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현재의 위치보다 약 남쪽으로 30M 아래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옷 주름과 매듭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기법과 당당한 자세는 통일 신라 전성기의 기백이 넘치는 조각수법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의 북쪽 사면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9호 마애관음보살의 입상이 있다. 높이는 1.5m이며, 오른손에는 설법인, 왼손에는 감로병을 들었으며, 머리의 보관에는 화불(化佛)인 아미타불이 조각되어 있다.
석불좌상에서 30m 가량 올라가면 동서 양벽에 각각 삼존불을 선각으로 조각한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이 있다. 우측 삼존상의 본존은 좌상, 협시는 입상이다. 음각으로 두광·신광·광배를 나타내었고, 밑으로는 연화대를 조각하였다.
좌측 삼존상은 특이한 형태로 본존의 오른손은 설법인,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고, 높이는 2.7m이다. 협시는 보살인지 천인(天人)인지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하여 공양하는 자세이다. 그 남벽으로 미완성의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삼릉계의 중턱에는 보물 제666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얼굴부분은 위로 반만 남아 있고 아랫부분은 파괴되었다. 옷주름은 가늘게 표현되었고 몸 부분은 풍부하다. 이 석불에는 원형의 신광과 보주형의 두광으로 된 큰 광배가 있다. 현재는 복원하여 안치되어 있다.
이 석불 뒤쪽에 있었던 약사여래상은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삼릉계의 금오봉 정상부근의 암자 위쪽에는 마애여래불상이 있다.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서 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높이 5.2m, 무릎너비 3.5m로서 굳센 기상과 단정한 모습을 담은 뛰어난 작품이다. 현재는 복원과 문화재 정비로 가까이 가서 볼 수는 없다.
금오봉 정상에서 경주 도심을 바라보면 형산강을 끼고 너른 들이 한 눈에 펼쳐진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군데 군데 솟아오른 아파트의 벽들만 없어도 옛 왕경의 숨결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경주 남산을 한, 두 면의 지면으로 옮긴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수많은 전설과 수천의 부처님이 상주하는 불국토 남산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 긍지이자 불교 예술이 빚어낸 세계적인 유적이다. 지난 2000년 12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주역사유적지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유산이 산재해 있는 종합역사지구로서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나누어져 있는데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 왕릉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세계유산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보다 잘 보존하고, 잘 공양 예배하여 부처님의 가지력이 우리나라에 충만하기를 서원하는 것이다.
경주남산=김종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