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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아단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7

데스크칼럼:새 대통령께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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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께 바란다

 

-화합과 소통으로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기를

 

지난 한해는 우리나라의 국운을 결정 짖는 중대한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다. 4월에는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 선거와 12월에는 대통령을 뽑는 총선이 이어졌다.

먼저 새로 취임한 대통령께 축하의 인사와 부처님의 가지력이 충만하시기를 서원한다.

우리나라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국가다. 헌법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첫째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둘째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세째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정하고 있다. 그만큼 국가를 책임지는 중책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광복을 맞은 우리민족은 극단적인 좌.우 대립을 거쳐 나라가 분단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쳤다. 강대국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 그 후에도 한번의 4.19혁명과 5.16을 거치면서 고도 경제성장 시기를 거쳐, 민주화의 험난한 파도를 넘어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선진국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정부는 아쉬운 점이 참 많은 정부다. 선진국으로의 진입과 중산층의 확대 및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약속하고 출범했다. 그러나 4대강사업 이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사업 등 국민의 합의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고 강행한 부작용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다. 평행선으로 치닫는 남북 관계는 북한의 삼대세습과 핵실험으로 엉킨 실타래 마냥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 이라는 막중한 직무를 어께에 짊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지혜로운 정치가 열리기를 바란다.

오늘은 불교인의 한사람으로 새 대통령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한다. 매번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들이 가장 많이 내세운 공약이 국민 대통합이나, 대화합이다. 해방이후 이데올로기 분쟁으로부터 민주화 운동,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서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이 먼저였다. 그러나 지금 까지는 화합보다는 분열을 이용한 정권유지에 급급했다고 본다. 늘어만 가는 빈부의 격차와 계층의 대물림은 우리 사회를 1%의 귀족이 지배하는 왕권 및 봉건의 역사로 되돌리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것이다. 부디 정권을 창출한 세력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이익과 화합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란다.

둘째로 서민경제의 활성화이다. 골목과 시장의 상인들이 일할 맛이 나야한다. 대형마트의 무차별적인 공세는 동네 구멍가게의 추억 빼앗아갔다. 대통령께서 공약하신 경제민주화의 실현만 잘 지켜주신다면 서민경제의 활로는 반드시 열릴 것이다.

세 번째로 문화 정책의 근시안을 버리고, 장기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시기를 바란다. 현재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 삼국은 독도나, 랴오닝섬 등 해상영토분쟁이 한층 가열화 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역사왜곡정책인 동북공정의 계략도 숨 가프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 즉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는 한류의 지원을 위해 많은 자금과 인원을 투입했다. 또한 많은 부가가치를 올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상업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장사가 안 되면 어떤 한류도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서양 대중문화의 기본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지금의 한류는 창조된 우리 문화라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우리 전통 문화와 역사를 화선지이 배경으로 깔아두고 진정한 한류의 창작품을 그려내기 바란다.

끝으로 공정한 종교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지난 정부 초기에 있었던 정부와 불교계의 마찰은 종교라는 특수한 신앙체계에 대한 이해부족과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이번 대통령께서는 불교계를 전통종교로서 특별한 대우를 해달라는 주문이 아니다. 국민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인원으로, 사원이나, 교회의 숫자로 그 종교의 면면을 봐서는 안 된다. 불교만 해도 많은 종단들이 있다. 대통령께서는 신도의 숫자로만 종교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나눔의 정책을 골고루 펴기를 바란다. 그러면 다문화사회에 이미 진입한 우리 후손들에게 다양한 종교문화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남겨줄 것이다.

 

오늘 아침 일간지에도 새 정권의 순조로운 출발을 알리기보다는, 국민의 이익을 앞세우며 치열한 싸움을 하는 소식들로 지면은 채워졌다. 정치에서 내일은 없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주 법계의 제불 보살님들과 국민들은 간절히 손을 맞잡고 화해하고, 협상하는 모습을 바랄 것이다. 부디 5년이라는 재임 기간 동안 따사로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정을 펼치기를 비로자나 부처님 전 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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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5

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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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최근 공영방송 KBS에서는 1,2TV를 통해 한국의 유산-운암 김성숙이 방영되고 있다. 정식 다규멘타리는 아니지만 프로그램 막간 팝업으로 인기가 높은 코너이다.

몇 장의 사진과 간단한 코멘트가 전부지만 운암 김성숙은 승려 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임을 확실히 전해준다.

스님이자, 항일투쟁가, 사상가, 저술인, 대학교수 등 파란만장한 태허(太虛)스님의 일생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봉선사서 수학하다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해방 후에는 반이승만 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재야운동에 참여했다. 말년에 가난과 병고와 싸우다가 쓸쓸하게 입적하면서도 그가 했던 말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였다. 어쩌면 평생을 은산철벽을 무너뜨려 도를 이루듯이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곧은 한길을 간 것은 아닌가?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무작정 가출 그러나 부처님 법연이 먼저였다.

 

태허스님은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성숙(星巖), 아호는 운암, 성숙은 법명이다. 자식이 없어 고심하던 그의 어머니는 미륵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스님을 얻었다. 어린 스님은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글방에 나가 한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 전국 곳곳에 독립학교가 설립됐다. 스님의 고향 철산에도 대한독립학교가 세워진다. 10살 때 입학한 스님은 그곳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등 외부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 하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학교는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섰다. 태허스님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그 무렵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낸 백부가 스님의 집을 찾아왔다. 백부는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백부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어린 스님은 자신도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간에 실린 스님의 회고는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스님은 만주로 향했다. 중국어를 몰랐던 그는 중국어를 안 쓰고 만주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건너가는 길을 택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 붙잡혀 여관에 붙들려 있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님은 출가한다.

그가 원산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부처님오신 날이었다. 원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강사로 구경을 가고, 시내가 텅 빌 정도였다. 스님도 여관주인을 따라 서강사로 갔다. 다음날 새벽 산책하던 중 그는 스님을 한명 만났다. 여관주인에게 벗어날 심산으로 스님에게 말을 물었다.

 

여보시오, 스님.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출가하려 하느냐?”

경전을 연구하려고요.”

 

스님은 자신을 양평 용문사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을 따라가면 출가할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그길로 용문사로 가서 출가 하고, 그곳에서 26개월 정도 수학했다.

 

그런데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커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초보 중노릇을 하는 모든 방법을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스님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스님(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은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224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스님(1879~1944)도 만나게 된다.

 

스님의 회상이다.

 

노스님은 손병희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스님은 손 영감이 오면 나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졌다. 만해스님과 김법린(1899~1964)도 자주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때 이름이 널리 나 있었다.”

 

봉선사에 머물면서 손병희, 만해스님, 김법린 등과의 인연으로 스님도 3.1운동에 가담한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선지 5년만의 일이다. 그는 봉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사상이 퍼져있었다. 만주, 상해,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해 비밀리에 사회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스님도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 가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김규하.김봉환.김정완.윤종묵.차응준스님 등 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북경에 도착한 그는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장건상(張建相. 1882~1974), 양명(梁明), 장지락(張志樂. 1905~1938)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던 그는 1926년 광동으로 가 광동코뮨에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임정을 떠났다.

 

좌우의 이념보다 민족의 해방이 우선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에 뒀던 스님,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되는 날까지 숨 가쁘게 투쟁해왔던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 좌익인물이라는 낙인, 그리고 박해였다.

19615.16 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혁신당의 리더로 활약해,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나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석방될 수 있었다. 이 때 부터 그를 도와주던 손길도 끊어졌다. 정권의 눈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 때 운허(耘虛)스님(1892~1980)은 가끔 쌀을 보내 스님의 생계를 도왔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태허스님.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그가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받쳤다. 정부는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태허스님은 만해스님. 김법린과 마찬가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는 이가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공양한 태허스님이 제대로 추모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자료제공= 운허 김성숙 기념 사업회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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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1

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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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우리 가까이 있는 가장 웅장하고 그 산세가 깊다.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이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울의 진산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중생대 말기에 지층에 파고든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표면에 드러났다가 다시 풍화작용을 받아 험준한 바위산이 되었다.

 

무학대사가 서울을 내려다 본자리?

 

주봉인 백운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황해의 섬도 보인다. 인수봉은 암벽 등반 코스로 인기가 높다. 봉우리 북쪽에 튀어나온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은 모양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 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백운대의 남쪽에 있는 만경대는 주변 경관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국망봉이라 불렸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지를 정할 때 여기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외에도 노적봉(716m)·영봉(604m)·비봉(碑峰:560m)·문수봉(716m)·보현봉(700m) 등 이름난 봉우리만도 40여 개나 된다.

조선시대 때 수도의 방어를 담당했던 북한산성,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터를 비롯해 유명한 북한 이궁지(離宮址), 진관사·문수암·태고사·원효암·상운사(祥雲寺도선사(道詵寺승가사·화계사 등 많은 사찰과 문화유적이 산재한다. 서울 외곽에 있어 연중 등산객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83년 도봉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오악사상

···북 및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북한산)을 일컫는다. 오악의 개념은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악에는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이 거처한다고 믿어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여겨 왔다. 신라 때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부악(父岳:지금의 팔공산)을 오악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고, 고려 때에는 덕적산(德積山) ·백악(白岳) ·목멱산(木蠶山:지금의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종주산(宗主山)으로서 조선 영조 때 망덕산(望德山)에 백두산단을 만들어 망제(望祭)을 지낸 일이 있다.

 

 

 

 

국가기도도량 도선사(道詵寺)

 

 

신라 경문왕 2862년 도선(道詵)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1863(철종 14) 김좌근(金左根)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하였으며, 1887(고종 24)에는 임준(任準)이 오층탑을 건립하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904년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받았다. 1916년 도선사의 중흥주인 청담(靑潭)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 등의 시주로 도량을 중수하였다. 이어서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에 입각한 실천불교와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호국참회원은 19771115일에 완공한 종합 포교센터이다. 지하 1, 지상 3, 총 면적 1,000평의 콘크리트 한옥식 건물로, 법당·영사실·도서실·신앙상담실·수련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석불이 있다.

 

 

 

'산신이 보좌를 튼 절' 삼천사

도선사와는 산의 반대편에 위치한 진관외동의 삼천사는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 1481(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 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특히 산령각은 정면 2,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을해년에 개축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산신은 산의 영()으로 산을 지키며 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산의 주인으로서 늘 가람의 뒤쪽에 자리하며 불법을 수호(守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좌우에 각각 독성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는 달리 나무에 새긴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삼각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삼천사를 '산신이 보좌를 튼 절'로 부르기도 한다.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많은 기도객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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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17

뷸교 총지종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총무부장 인선정사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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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총무부장 인선정사 선임

 

불교총지종 효강 종령 예하는 현재 공석중인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종헌, 종법에 의거하여 129일자로 현재 공석중인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인선정사를 선임했다.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정사는 총기28년 항마급 대법사로 승직에 입직하여, 통리원 사무국장, 마산 운천사 주교, 사회부장, 총무부장 등 종단 주요 보직을 거쳤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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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14

전국사원 상반기 49일 불공 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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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안녕과 자녀 잘되기 서원

 

불교총지종은 219일 전국 사원에서 총기 42년 상반기 49일 불공에 들어갔다.

서울 총지사(주교 법등정사) 서원당은 총기42년 전반기 49일 불공에 스승과 교도 모두가 진호국가불사와 자녀 잘되기 서원에 한 마음을 모았다. 총지사 주교 법등정사는 설법을 통해 전반기 49일 불공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녀 잘되기 불공을 병행해야 된다.며 원정 대성사께서 제정하신 총지종의 특별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총지종의 모든 스승과 교도가 일치단결하여 49일 동안 정진해야합니다. 또한 수행 기간 중에는 계율을 지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정진에 방해가 되는 장소의 출입을 삼가하고 시간을 지킬 수 있도록 다 같이 서로를 경책하며 불공에 임합시다.”며 입제에 드는 교도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49일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와 자성(自省)의 시간을 되기 바란다.

<진호국가불사>의 진언은 움훔야호사이다. 이 진언불사 출처는 종조 원정 대종사가 밀교경전인 수호국계주다라니경에 근거했다. 의궤의 정립은 총기8(1979) 426일 춘계강공회에서 제정되었지만, 이미 1975년부터 진호국가불사의궤를 시행했었다. 내용은 나라발전, 국태민안, 조국평화통일을 기원한다. 이 호국 불사는 1년에 2회 상.하반기로 나누어 각각 49일 동안 행한다. 또한 총기20(1991)부터 종령 특별 유시로 자녀가 잘 되어 나라의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자손 불공이 시작되었다. 상반기 49일 불공은 48(양력)에 회향된다. 회향일의 의미는 부처님오신날이 음력 48일이지만, 종단은 이를 양력으로 정했으므로 8일에 마친다. 총지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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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7:36

제43회 동해중 졸업식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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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해인으로 21세기의 주역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총기42년 종립 동해중학교 졸업식이 26일 오전 1030분이 해오름관에서 봉행되었다.

졸업식에는 총지종 종립 관음학사 이사장 지성 정사, 법선 학교법인 사무국장, 변 혁 총동창회 사무총장 및 학부모 내빈 약 500여명이 참석하여 3년간의 중학교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들을 축하했다.

이날 졸업식은 예전의 방식과는 달리 졸업생들이 제작한 동영상 상영을 통해 3년간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특히 졸업생 전원이 단상에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졸업장과 상장을 수여 받고, 이사장 지성 정사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장재계 교장 선생님은 회고사를 통해오늘 졸업하는 학생들은 제가 학교장으로 취임하던 해 본교에 입학한 학생들입니다. 올해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자랑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012년 동래교육청 관내에서 성적 향상률이 보통이상에서 1, 기초미달 부분에서는 관내 2위를 달성하였으며, 이과 쪽으로는 부산과학고에 2명 부산일과학고에 3, 문과 쪽으로는 부산외고 1, 부일외고에 4, 그리고 해운대고 1, 북일고 1명이 합격했습니다. 특히 졸업생 전원이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고등학교에 전원 진학하였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을 격려했다.

이어 이사장 지성정사는 축사를 통해 졸업은 끝남과 동시에 시작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 세계는 국제화, 개방화의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온 세계를 무대로 하여 개인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지식, 정보화 시대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세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역량과 자세를 기를 때입니다.”며 정보화 시대의 주역이 될 졸업생들의 앞날을 축하했다.

이날 졸업식에서는 영예의 이사장 상은 임민규군이 수상하였고, 3학년1반 이광선 외 3명이 불교총지종 장학금을 받았고, 21명의 졸업생에게 동창회 장학금 등이 수여되었다. 동해중학교는 19683월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제43회 졸업생 174명을 더해 총 졸업생 17,140명이 졸업한 전국 최고의 명문 종립학교이다. 부산 동해중=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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