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48 Page)불교인사이드
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6:56

불교총지종 제40주년 창교절

반응형

불교의 생활화와 세계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

 

*창교절 법문하시는 효강 종령 예하

불교총지종 제40주년 창교절 법회가 지난 1224일 총본사 총지사를 비롯한 전국사원에서 일제히 봉행되었다. 이날은 종조 원정 대성사께서 주옥같은 진언과 정확한 인계, 엄격한 의궤와 사종수법을 비롯한 정연한 교상(敎相)과 사상(事相)을 갖춘 정통밀교 총지종을 세상에 선포한 날이다.

총본산 서울 총지사에서는 효강 종령 예하를 모시고 총지사 주교 법등정사의 집공으로 제40주년 창교절 기념 법회를 열었다. 효강 종령 예하는 전국의 사원으로 전달된 유시문을 통해 원정대성사님께서는 종명을 지으실 때 대한불교총지종이라 하지 않고 불교총지종이라 명명하신 이유는 불교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모든 세계인들의 위한 종교이어야 하고 세상 모든 중생들을 대상으로 교화해야 한다는 큰 뜻 때문입니다.

총지종에서 창설한 국제재가불교지도자대회에서도 알 수 있듯 총지종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하여 참 불교의 뜻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2007년 국제재가불교대회를 조직하고 매년 대회를 개최하여 동남아는 물론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의 불자들의 참여로 총지종의 위상을 알림과 동시에 불교의 생활화와 세계화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며 총지 종풍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다하기를 당부하였다. 또한 2회 통일음악예술제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통해 그동안 잠재되어있던 교도들의 단합된 모습을 올해에도 이어나가기를 서원했다. 이날 법회 후에는 총지사 신정회 주최로 윷놀이4개 팀으로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전국의 사원에서도 창교절을 맞아 종단발전의 새로운 서원을 다지고, 서로를 축하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총지사=김종열 기자

반응형
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6:50

전국 기로스승 총회. 11월20-22까지 속초에서

반응형

종단 교화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최고의 자리

 

 

종단 기로 스승들이 종단발전을 위한 세미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1120일부터 22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대명콘도에서 총기41년 전국기로스승총회가 열렸다. 효강 종령예하를 비롯한 30명의 기로스승들은 종단 대형버스로 이동 여장을 풀고, 먼저 설악산 권금성을 케이블카로 올라 깊어가는 가을의 마지막 정취를 감상했다. 속초 대선항으로 이동하여 저녁 공양을 한 후, 척산온천에서 여정의 피로를 풀었다. 총회 이튿날에는 화진포 일대를 관불한 후, 통일전망대 통일대불에서 남북통일을 위한 서원불공을 오렸다. 기로스승들은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백두에서 한라까지 총지 밀법의 진리가 전해지기를 서원했다. 비무장지대 안 건봉사 참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기로스승들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효강종령 예하의 입장과 통리원을 대표해 지성 통리원장과 인선 총무부장이 참석했다. 간단한 상견례를 마치고, 집행부를 대표해 지성통리원장은 오늘 같이 종단의 여러 스승들을 모시게 되어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이 자리의 스승님들이 교화의 일선에 계실 때, 종단은 장종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현재 약간의 정체된 모습에 집행부를 대표하고, 후배 정사로서 죄송스럽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따끔한 질책과 성원의 법문을 내려주십시오인사말을 했다.

이어 효강종령 예하는 종단의 어려운 사정에도 이번 자리를 만들어 준 통리원 집행부에 감사드린다. 이렇게 설악산에서 기로스승 만이 모인 건 처음이다. 종단 초기 그 어려운 시절을 잘 이끌어 나간 것은 모두가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불공과 교화의 덕입니다.”요즈음 들어 우리 종단에 좋은 소식들이 있습니다. 지난 5회를 우리 종단 주관아래 개최하였던 국재재가불자대회가 이번에 스페인에서 대단한 규모로 열렸습니다. 우리 대표단 4명이 가보니 우리 총지종이 한국 최고의 종단으로 인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우도 최고로 받았답니다. 또한 이번에 처음으로 참가한 일본의 입정교성회에서는 내년도 대회를 자진해서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40여 년 전 종단을 창종하신 원정대성사의 셰계불교로의 참뜻이 오늘에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내 교화도 중요하지만 세계교화라는 과제를 이미 우리에게 던져 주신것입니다. 바로 종조님의 뜻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지속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 종풍 운동을 통해 이루어야 합니다. 최근 종비생으로 공부하신 분들과 염송정진에 대한 실천적 체험을 체계화 하는 과정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기로스승 여러분들이 모범이 되어 후진들을 이끌어 주시고 가끔 적 적극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며 최근 종단의 상황에 대해 유시하셨다.

 

종단 기로스승들은 그동안 경험은 교화의 방법과 종단 발전 방안에 대해 많은 의견들을 제세했다. 가장 먼저 나온 얘기가 바로 법을 바로 세우자는 의견이다. 원정대종사께서 처음 창종 할 당시의 정신으로 초발심의 각오로 종단의 종지를 바로세우고 교화의 새로운 방편을 세우자. 또한 괴산 수련원의 조속한 완공으로 집중 수행 공간 확보와 장차 총지 밀교의 본산으로서의 역할을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현재 젊은 스승들이 시도하는 다양한 교화 방편은 아주 긍정적이다. 특히 이번 강공을 통해 발표한 다양한 방편들은 종단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발전 정착 시켜야한다. 일부 몇몇 스승의 자녀들이 불공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는 통리원 차원에서 강력히 요구하여야 한다는 생각들이다. 최소한 자녀들이 부모의 상례에서 열리는 추복 의궤 만큼은 알아야한다는 의견이다. 이외에도 많은 의견들이 나왔으나, 집행부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강력한 추진력을 더 요청했다.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총회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자리를 정리했다. 통리원에서는 이날의 의견들이 종무행정 전반에 걸쳐 적극 반영하기로 했다.

 

속초=김종열 기자

 

반응형
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6:45

편집위원이가다.(남한산성 편)

반응형

작은 궁궐; 전란을 대비한 완벽한 시설 남한산성 행궁

 

 

 

가을이 깊다. 남한산성을 오르는 좁은 2차선 도로의 양옆으로 단풍이 한창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는 느껴지 못한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오늘 온몸으로 느낀다. 지난 4월 호암미술관 취재를 끝으로 한동안 편집위원들이 취재를 나서기가 힘들었다. , 하반기 불공과 호국안민기원대법회, 2회 통일음악예술제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이제 한 숨 돌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남한산성으로 편집위원들이 다시 모였다. 총지사에 모여 미니버스에 올라, 30분도 안되어 남한산성 한 가운데에 당도했다. 이리 가까운 곳에 자연을 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을 왜 몰랐을까? 오늘은 남한산성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독자들에게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전해야겠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산성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한양을 지키던 최후의 보루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이다. 백제가 한강유역의 한성 백제를 온조왕의 성터라는 전설이남아있다. 본격적인 성곽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 축조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인조 21624년에 지금의 형태로 축성을 본격화 한다.

남한지(南漢志)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沈器遠)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의 부역(賦役)은 주로 승려가 맡았다. 4()8암문(暗門)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官衙)와 창고 및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으며,16267월에 공사를 마쳤다. 이후에도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은 상궐(上闕) 73() , 하궐(下闕) 154간 이었다. 재덕당(在德堂)은 숙종 l4년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社稷壇)을 옮길 우실(右室)도 세웠다. 한마디로 작은 궁궐을 옮겨 놓았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客館:人和館)1829(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坐勝堂), 장각(日長閣), 수어청(守禦廳), 제승헌(制勝軒)이 건립되었다.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裨將廳), 교련관청(敎練官廳), 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비롯하여 종각(鐘閣), 마랑(馬廊), 뇌옥(牢獄),등이 들어서 유사시 군 사령부 역할을 하였다.

 

불법과 나라를 같이 지켜낸 승군(僧軍) 최고 사령부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나라를 지키는 승군을 총괄하는 승도청(僧徒廳)이 자리했다. 팔도 승군을 총괄하는 관청으로, 나라가하면 분연히 일어나 창을 드는 성군(聖軍)으로서의 불교도와 스님들의 힘은 대단히 컸다.

남한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였다. 이들의 승군의 수행과 거처를 위하여 예전부터 있던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 외에 개원(開元), 한흥(漢興), 국청(國淸), 장경(長慶), 천주(天柱), 동림(東林), 동단(東壇)의 일곱 개의 사찰(寺刹)이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고, 나머지는 폐사지로 사적으로 지정 되어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5()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前營將)은 남장대(南將臺),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八作)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板門)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개방되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虹霓門)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單層) 문루(門樓)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남한산성의 축성 완성 된 뒤,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이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인조 14)1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和議)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役事)의 현장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인조 171639년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는다. 이란을 우리는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청은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을 받아내고, 그 자리에 새운 굴욕의 비석이 바로 삼전도비.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로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고 전한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의 한쪽 면에는 한문, 다른 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 몽골문으로 번역되어,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미술사적으로는 조선 후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원래는 석촌호수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고종 32) 매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04월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어떤 나라라 하더라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반면, 잊지말아야하는 치욕의 역사도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우리의 역사이다. 최근 일본이 행하는 영토 분쟁이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 인식을 바라볼 때, 역사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고민해 본다.

 

취재=편집위원 이인성, 박묘정, 박정희, 최영아, 강경민 통신원 양재범, 이형자, 김옥임

편집정리=김종열 기자.

반응형
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6:00

안동 봉정사 삼성각과 제비원 미륵불

반응형

11세기 화엄 밀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봉정사 삼성각

 

 

 

 

 

 

안동. 불법의 향기를 품은 국화 같은 고장

 

안동하면 소수서원, 양반 마을, 하회탈, 간 고등어 등 여러 단어들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왔을 때 ,하회마을 류성룡의 종가와 봉정사를 방문했다. 하회마을은(중요민속자료 제122)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유학이 성행하고, 양반가의 명망으로 이름이 높은 안동에는 의의로 많은 불교문화재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전탑의 웅장한 모습을 전해주는 신세동 전탑을 비롯해 살아있는 불교건축 박물관인 봉정사, 거대한 통 바위 위에 불두 만 조성해 얻은 제비원 미륵불 등 발길 닫는 곳 마다 불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봉정사는 소백산 자락의 천등산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 자락은 국화 재배로 유명하다. 사찰이 위치한 서후면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에 국화 축제를 열고,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에게 국화의 진한 향기를 선사한다.

 

천상의 선녀도 감복한 불퇴전의 수행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하신 사찰이다. 스님이 한창 수행 정진 할 때, 산세 좋기로 유명한 대망산(지금의 천등산) 기슭의 바위굴에서 공부했다. 스님의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을 찾아 하늘에서 가져온 등불로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부터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천등산'이라 부른다. 능인스님은 이후 더욱 수행에 매진하여 얻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떨어져 산문을 개산한다. 스님이 말린 종이 봉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봉정사라는 이름을 짖는다.

봉정사는 창건 설화만큼 오래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다름 아닌 봉정사 극락전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고,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본존은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한다.

 

천등산을 감싼 진언의 기운

 

대망산이었던 천등산은 봉정사 극락보전 왼편으로 삼성각을 두고 있다. 여느 삼성각과 마찬가지지만, 외전으로 자리하는 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단칸집이다. 그러나 출입구 양쪽에 벽을 설치하여 언 듯 보기에는 단칸이지만 세 칸으로 보이는 양식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나란히 봉안한 전각은 천등을 이어나가는 외호신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산신도와 산신상을 함께 모셨는데, 지나치게 커 보이는 소나무는 다른 지역의 산신도의 양식과 조금 다른 특별함을 보인다. 산신각을 천천히 살피던 중 지붕아래 보에서 범자 옴자와 마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산신각, 삼성각을 취재했지만 범자가 보나, 도리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천등사 대웅전의 우물 천정에서도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을 만났다. 정확한 사료의 분석과 검토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의 화엄종의 수 사찰인 부석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화엄 밀교에 그 연원을 추정해 본다. 또한 11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13세기 경에 널리 퍼진 밀교 경전 대승장엄보왕경의 육자진언과 성음구제사상의 영향으로 밀교적 화엄사상이 고려 말기에 이 지역에도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과 성주풀이

 

서후면 봉정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비원 미륵 석불은 보물 제116호로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불상의 발아래 단판연화문으로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고려 마애불의 유행고 함께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겨진 수인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이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은 제비원 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 불교문화의 단면을 결정적인 단서이다. 자연거석을 하나의 석상 보고자 하는 고려 마애불의 특징적 형태이다. 또한 불상의 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통일 신라의 조각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미륵신앙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종교성이 강한 미륵신앙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된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 건국의 복잡한 정세를 타고 변모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볼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오랜 민속신앙인 성주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가옥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성주신은 가택신을 말하는데 선조들은 성주신이 가옥을 지키고, 가옥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민속 신앙의 그 발원처가 안동의 제비원 미륵 부처님이다. 성주고사 때 부른 성주풀이에는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라는 가사에 나오듯 이곳 제비원 미륵이 바로 우리나라 모든 가택을 지켜주는 성주신임을 확인해 준다. 제비원의 미륵 부처님은 성주신으로 화현하여 오랜 동안 우리의 집안을 지켜온 것이다. 안동=김종열 기자.

 

 

-11세기 화엄 밀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봉정사 삼성각

 

안동. 불법의 향기를 품은 국화 같은 고장

 

안동하면 소수서원, 양반 마을, 하회탈, 간 고등어 등 여러 단어들이 떠오른다. 몇 해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을 왔을 때 ,하회마을 류성룡의 종가와 봉정사를 방문했다. 하회마을은(중요민속자료 제122)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유학이 성행하고, 양반가의 명망으로 이름이 높은 안동에는 의의로 많은 불교문화재가 남아있다. 고려시대 전탑의 웅장한 모습을 전해주는 신세동 전탑을 비롯해 살아있는 불교건축 박물관인 봉정사, 거대한 통 바위 위에 불두 만 조성해 얻은 제비원 미륵불 등 발길 닫는 곳 마다 불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봉정사는 소백산 자락의 천등산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1614호 후불벽화, 보물 제1620호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천등산 자락은 국화 재배로 유명하다. 사찰이 위치한 서후면은 해마다 10월 마지막 주에 국화 축제를 열고, 전국의 불자와 관광객들에게 국화의 진한 향기를 선사한다.

 

천상의 선녀도 감복한 불퇴전의 수행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이 창건하신 사찰이다. 스님이 한창 수행 정진 할 때, 산세 좋기로 유명한 대망산(지금의 천등산) 기슭의 바위굴에서 공부했다. 스님의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을 찾아 하늘에서 가져온 등불로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는 설화가 있다. 이때부터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하고, 대망산이라 불리던 산의 이름도 천등산'이라 부른다. 능인스님은 이후 더욱 수행에 매진하여 얻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지금의 봉정사 자리에 떨어져 산문을 개산한다. 스님이 말린 종이 봉황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봉정사라는 이름을 짖는다.

봉정사는 창건 설화만큼 오래 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 다름 아닌 봉정사 극락전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柱心包)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 건물은 감실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폐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고,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본존은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한다.

 

천등산을 감싼 진언의 기운

 

대망산이었던 천등산은 봉정사 극락보전 왼편으로 삼성각을 두고 있다. 여느 삼성각과 마찬가지지만, 외전으로 자리하는 터라 그리 크지 않은 소박한 단칸집이다. 그러나 출입구 양쪽에 벽을 설치하여 언 듯 보기에는 단칸이지만 세 칸으로 보이는 양식이다. 산신, 칠성, 독성을 나란히 봉안한 전각은 천등을 이어나가는 외호신으로 그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산신도와 산신상을 함께 모셨는데, 지나치게 커 보이는 소나무는 다른 지역의 산신도의 양식과 조금 다른 특별함을 보인다. 산신각을 천천히 살피던 중 지붕아래 보에서 범자 옴자와 마자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사찰의 산신각, 삼성각을 취재했지만 범자가 보나, 도리에 새겨진 것은 처음이었다. 천등사 대웅전의 우물 천정에서도 관세음보살 육자진언을 만났다. 정확한 사료의 분석과 검토를 해야 밝혀지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의 화엄종의 수 사찰인 부석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진 화엄 밀교에 그 연원을 추정해 본다. 또한 11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13세기 경에 널리 퍼진 밀교 경전 대승장엄보왕경의 육자진언과 성음구제사상의 영향으로 밀교적 화엄사상이 고려 말기에 이 지역에도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과 성주풀이

 

서후면 봉정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비원 미륵 석불은 보물 제116호로 자연암벽에 불신을 새기고 그 위에 머리는 따로 제작하여 올려놓은 거구의 불상이다. 미소를 띤 풍만한 얼굴은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붉게 채색된 두터운 입술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이다. 삼도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새겨 장식하였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법의 주름은 도식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불상의 발아래 단판연화문으로 음각으로 새겼다.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 조각 양식으로 보아 11세기 무렵, 고려 마애불의 유행고 함께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각으로 새겨진 수인에는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여래이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 마애불의 이름은 제비원 미륵으로 불리고 있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 불교문화의 단면을 결정적인 단서이다. 자연거석을 하나의 석상 보고자 하는 고려 마애불의 특징적 형태이다. 또한 불상의 일부를 입체적으로 표현된 양식은 통일 신라의 조각 기법과 고려의 표현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 사이의 정치적 변동과 맞물려 미륵신앙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특히 하층민들의 경우 종교성이 강한 미륵신앙에 새로운 희망을 걸게 된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 건국의 복잡한 정세를 타고 변모하는 민중불교의 성격을 가지는 미륵신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볼 수 있다.

제비원 미륵불은 오랜 민속신앙인 성주신앙과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가옥을 짓거나 이사를 하면 성주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성주신은 가택신을 말하는데 선조들은 성주신이 가옥을 지키고, 가옥내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믿었다. 바로 그 민속 신앙의 그 발원처가 안동의 제비원 미륵 부처님이다. 성주고사 때 부른 성주풀이에는 성주의 근본이 어드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제비원에 솔씨 받아...”라는 가사에 나오듯 이곳 제비원 미륵이 바로 우리나라 모든 가택을 지켜주는 성주신임을 확인해 준다. 제비원의 미륵 부처님은 성주신으로 화현하여 오랜 동안 우리의 집안을 지켜온 것이다. 안동=김종열 기자.

 

반응형
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5:33

제80회 추계강공회 봉행

반응형

 

참 스승의 자세로 교화의 신기원을 이루자.

 

총기 41년 불교총지종 춘계강공회가 1017일부터 19일까지 서울 통리원에서 봉행되었다. 전국의 기로스승을 비롯한 총지종 승단은 17일 통리원 인선 총무부장의 집공으로 개강불사를 봉행했다.

3.7 의궤에 이어 불교 총지종 효강 종령예하는 법어에서 참석하신 여러 스승님들은 종조님께서 강조하신 참스승의 위의와 도리를 이번 강공회를 통해 확실히 되새기는 자리여야 합니다. 불교 종단의 흥망성쇠는 승직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종단의 성쇠는 승직자들의 수행 여하에 결정됩니다. 오늘 팔십 번째 강공회가 개최되는 오늘을 기점으로 종조님이 휴훈으로 남기신 참스승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강공은 전 승단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자리입니다. 강공의 모든 일정을 통해 우리들의 수행력과 법력을 증장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승직자 본연의 서원은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대비만행을 이루는 것입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번 강공을 수행하여 종단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를 바랍니다.”며 추계강공을 통해 스승 본연의 자세를 되새기기를 당부하였다.

지성통리원장은 인사말을 지난 주 봉행된 제2회 통일 음악예술제를 통해 수고해 주신 많은 스승님들과 교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강공을 통해 일어설 수 있다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기원 합니다.”며 원만한 강공이 되기를 서원했다.

이어 효강 종령 예하의 특별 정신교육이 이어졌다.(종령 정신교육 전문 5) 이번 강공은 외부 초청강사 없이 총지사 법등 정사의 밀교 연송선, 백월사 법우정사의 생각을 바꾸자, 밀교연구원 법경정사의 밀교입문, 운천사 도현정사의 불교상담심리학강의가 있었다. 강공회에 앞서 원의회, 유지재단이사회, 사회복지법인 이사회가 연석으로 열려 중앙 종회에 상정 할 안건들을 심의했다.

전국의 스승들은 토론과 발표 위주의 이번 강공 프로그램을 통해 얻은 교화의 방편을 실행하기를 비로자나 부처님 전 서원 하였다. 통리원=김종열 기자

 

 

 

반응형
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5:24

김 기자가 가다. 연꽃으로 피어난 불공의 원력

반응형

인천 지인사 신정회 홍순유 회장의 남다른 가피 이야기

 

인천에는 총지종의 두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광역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시 북구에서 부평구로 이름을 바꾼 이곳에 시법사, 지인사 두 사원 모두가 오랜 세월 교화의 도량으로 큰 틀을 이루고 있다.

최근 지인사에는 웃음이 넘치고 있다는 이형자 통신원의 제보를 받은 기자는 그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올해처럼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지나면서 무슨 좋은 일인가? 한여름 더위를 불공으로 이겨내서 그런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통신원의 제보에 지인사 승효제 전수님께 사전 약속을 하고 자승일 불공 때 인천으로 차를 달렸다.

부평은 초행이라 자동차의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서울 순환 고속도로를 거쳐 송내 나들목으로 진출했다. 직진과 우회전을 거쳐 골목으로 접어드니 바로 지인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네비게이션의 잘못된 안내로 골탕을 먹은 적도 있지만 이번만큼은 그 성능에 만족했다.

여러 총지종 사찰을 방문 취재해 보았지만 지인사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깔끔하다는 느낌이다. 사원 마당을 들어서니, 여러 가지 꽃들이 만발하다. 연꽃을 피운 여러 개의 수조도 보이고, 사원의 분위기보다는 잘 가꾸진 공원에 온 느낌이다.

자승일 불공을 모두 마친 후 교도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단체 사진을 먼저 찍어드렸다. 기왕 왔으니 최소한의 서비스는 기본 아닌가? 다함께 공양을 한 후, 서원당에서 홍순유 회장과 박옥선 부회장, 최광희, 김태순 감사님과 자리를 마련했다. 김 기자는 회장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다. “회장님. 지인사에 얼마나 기쁜 일이 있길래.. 서울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회장님은 수줍은 웃음을 띄우며 우리 사원이 최근 리모델링을 통해 훨씬 밝아졌습니다. 그리고 정원의 꽃들이 너무 예뻐 교도들의 얼굴이 꽃처럼 환해져 그런가 봅니다.” 라 말한다. 그러면서 꽃들을 정성들여 가꾸어주신 지성정사님과 승효제 전수님의 여름동안의 노고에 감사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박옥선 부회장이 진짜 경사는 회장님 댁에 있습니다.”회장님 아드님이 이번에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습니까?” 김 기자의 귀가 번뜩였다. “아 그런 경사가 있었군요.”

홍순유 회장님의 아들은 이 나라 국방을 책임지는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였다. 홍순유 회장의 아들 강인식 소령은 12녀 중 막내로 대학을 졸업하고 ROTC로 임관해 직업군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어린 젓 먹이 때부터 회장님의 등에 업혀 지인사를 다녔다 한다. 지금도 휴가 때면 지인사에 들러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에 감사의 불공을 드린다.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회장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병으로 의무 복무만 하는 것도 아닌 장교로서 병사들을 통솔해야하는 직책은 먼저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중요한 자리다. 홍순유 회장님은 강 소령이 입대하는 날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들을 위한 불공을 올렸다. 회장님의 불공은 우주법계를 움직여 강 소령에게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펼쳐진다. 강 소령이 보직을 옮기고 나면 전 근무처에서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전방 GP에서 근무 중, 차량 사고를 극적으로 피한 일 등 모두가 하루도 끊이지 않았던 홍 회장님의 불공의 힘이었다. 군대는 매일 사고와 위험을 안고 있는 곳이다.

김 기자가 군 생활을 하던 20여 년 전 에도 많은 사고를 목격했다. 지금도 아찔했던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제대하고 나서 안 일이지만 우리 모친께서도 매일 양초공양을 올렸다 한다. 위험하고 어두운 곳을 밝혀 달라고 부처님 전 서원했다고 하셨다. 김 기자가 지금도 부처님 일을 하는 것도 모두가 어머니의 양초공양 덕이 아닌가 생각한다.

홍 회장님이 총지종에 입교한 사연 또한 남다르다. 경기도 화성의 부유한 집에서 자란 홍 회장님은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양장기술자였다. 부평 토박이인 강정희 각자님을 만나 이곳으로 왔다. 당시 부평에는 양장 원단을 만드는 공장들이 있어 작은 양장점을 운영하며 살림을 꾸려갔다.

1973년 어느 날, 당시 정혜원 스승님이 법의를 만들고자 오셨다. 홍 회장은 단번에 스승님께 반했다 한다. 저리 멋진 옷을 입고 다니시는 분들은 뭔가 남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정혜원 스승님의 교화로 바로 총지종에 입교해 오늘날까지 39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행정진에 임했다. 홍 회장님의 수행 기간이 바로 지인사의 역사인 것이다. 강정희 각자님도 열정적이다. 사원의 힘든 일을 도맡아 하시고, 홍 회장님이 신정회를 이끌어나가는데 큰 역할을 한다.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에 한참을 넋을 잃고 얘기를 들었다.

지인사가 인천 교화의 중심 도량인 이유가 있었다. 밤 낮 없는 수행정진으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가지력이 두루 미치는 성취의 도량 지인사. 그 곳에는 자애로운 두 분 스승님과 사원을 내 집 같이 생각하는 교도들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원을 나서는데, 배웅해 주시는 홍 회장님과 각자님의 모습이 한 쌍의 연꽃으로 어른거린다. 인천 지인사=김종열 기자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