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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1

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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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와 산신신앙의 원당 도선사와 삼천사

 

 

 

 

서울의 진산

 

북한산은 우리 가까이 있는 가장 웅장하고 그 산세가 깊다. 예로부터 백두산,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대한민국 오악(五嶽)에 포함되는 명산이다. 세 봉우리인 백운대(白雲臺, 836.5m), 인수봉(人壽峰, 810.5m), 만경대(萬鏡臺, 787.0m)가 큰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삼각산(三角山) 또는 삼봉산(三峰山), 화산(華山), 부아악(負兒岳) 등으로도 불린다. 고려시대부터 삼각산이라고 하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북한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울의 진산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중생대 말기에 지층에 파고든 화강암이 지반의 상승과 침식작용으로 표면에 드러났다가 다시 풍화작용을 받아 험준한 바위산이 되었다.

 

무학대사가 서울을 내려다 본자리?

 

주봉인 백운대에 오르면 서울 시내와 근교가 한눈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강화도·영종도 등 황해의 섬도 보인다. 인수봉은 암벽 등반 코스로 인기가 높다. 봉우리 북쪽에 튀어나온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은 모양 같다고 하여 부아악(負兒岳)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동명왕의 왕자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잡고 살 만한 땅을 고를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서울의 지세를 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백운대의 남쪽에 있는 만경대는 주변 경관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국망봉이라 불렸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지를 정할 때 여기에 올라서 내려다보고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외에도 노적봉(716m)·영봉(604m)·비봉(碑峰:560m)·문수봉(716m)·보현봉(700m) 등 이름난 봉우리만도 40여 개나 된다.

조선시대 때 수도의 방어를 담당했던 북한산성, 비봉의 진흥왕 순수비 터를 비롯해 유명한 북한 이궁지(離宮址), 진관사·문수암·태고사·원효암·상운사(祥雲寺도선사(道詵寺승가사·화계사 등 많은 사찰과 문화유적이 산재한다. 서울 외곽에 있어 연중 등산객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983년 도봉산과 함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오악사상

···북 및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북한산)을 일컫는다. 오악의 개념은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비롯되었으며, 오악에는 나라의 수호신(守護神)이 거처한다고 믿어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여겨 왔다. 신라 때에는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부악(父岳:지금의 팔공산)을 오악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고, 고려 때에는 덕적산(德積山) ·백악(白岳) ·목멱산(木蠶山:지금의 남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종주산(宗主山)으로서 조선 영조 때 망덕산(望德山)에 백두산단을 만들어 망제(望祭)을 지낸 일이 있다.

 

 

 

 

국가기도도량 도선사(道詵寺)

 

 

신라 경문왕 2862년 도선(道詵)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선은 이곳의 산세가 1,000년 뒤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고 예견하고 절을 창건한 뒤, 큰 암석을 손으로 갈라서 마애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의 중건·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북한산성을 쌓을 때는 승병들이 이 절에서 방번(防番보초 임무)을 서기도 하였다. 1863(철종 14) 김좌근(金左根)의 시주로 중수하고 칠성각(七星閣)을 신축하였으며, 1887(고종 24)에는 임준(任準)이 오층탑을 건립하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였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며, 1904년 국가기원도량(國家祈願道場)으로 지정받았다. 1916년 도선사의 중흥주인 청담(靑潭)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 및 육영수 여사 등의 시주로 도량을 중수하였다. 이어서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불교의 평화 염원에 입각한 실천불교와 생활불교운동을 전개하였다.

호국참회원은 19771115일에 완공한 종합 포교센터이다. 지하 1, 지상 3, 총 면적 1,000평의 콘크리트 한옥식 건물로, 법당·영사실·도서실·신앙상담실·수련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로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석불이 있다.

 

 

 

'산신이 보좌를 튼 절' 삼천사

도선사와는 산의 반대편에 위치한 진관외동의 삼천사는신라 문무왕 원년인 661년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하였다. 1481(조선 성종 12) 편찬된 동국여지승람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한때는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 했다고 하며,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따오지 않았나 추측된다.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병들의 집합소로 활용되었으나 이후 불에 타 없어졌다. 뒷날 이 절의 암자가 있던 자리에 진영이 중창하였다.

1950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60년에 중건하고 1978년 성운이 중수했으며, 1988년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특히 산령각은 정면 2, 측면 2칸의 전통 건축양식인 맞배지붕으로 을해년에 개축하였다. 내부 중앙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산신탱화를 봉안하였는데 산신은 산의 영()으로 산을 지키며 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신으로 산신령(山神靈)이라고도 한다. 산의 주인으로서 늘 가람의 뒤쪽에 자리하며 불법을 수호(守護)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좌우에 각각 독성탱화와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는데 다른 사찰과는 달리 나무에 새긴 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삼각산의 산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이유에서 삼천사를 '산신이 보좌를 튼 절'로 부르기도 한다. 영험한 곳으로 소문이 나 많은 기도객의 참배가 끊이지 않고 있다.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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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17

뷸교 총지종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총무부장 인선정사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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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총무부장 인선정사 선임

 

불교총지종 효강 종령 예하는 현재 공석중인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종헌, 종법에 의거하여 129일자로 현재 공석중인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인선정사를 선임했다.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정사는 총기28년 항마급 대법사로 승직에 입직하여, 통리원 사무국장, 마산 운천사 주교, 사회부장, 총무부장 등 종단 주요 보직을 거쳤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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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14

전국사원 상반기 49일 불공 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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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안녕과 자녀 잘되기 서원

 

불교총지종은 219일 전국 사원에서 총기 42년 상반기 49일 불공에 들어갔다.

서울 총지사(주교 법등정사) 서원당은 총기42년 전반기 49일 불공에 스승과 교도 모두가 진호국가불사와 자녀 잘되기 서원에 한 마음을 모았다. 총지사 주교 법등정사는 설법을 통해 전반기 49일 불공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녀 잘되기 불공을 병행해야 된다.며 원정 대성사께서 제정하신 총지종의 특별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총지종의 모든 스승과 교도가 일치단결하여 49일 동안 정진해야합니다. 또한 수행 기간 중에는 계율을 지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정진에 방해가 되는 장소의 출입을 삼가하고 시간을 지킬 수 있도록 다 같이 서로를 경책하며 불공에 임합시다.”며 입제에 드는 교도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49일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와 자성(自省)의 시간을 되기 바란다.

<진호국가불사>의 진언은 움훔야호사이다. 이 진언불사 출처는 종조 원정 대종사가 밀교경전인 수호국계주다라니경에 근거했다. 의궤의 정립은 총기8(1979) 426일 춘계강공회에서 제정되었지만, 이미 1975년부터 진호국가불사의궤를 시행했었다. 내용은 나라발전, 국태민안, 조국평화통일을 기원한다. 이 호국 불사는 1년에 2회 상.하반기로 나누어 각각 49일 동안 행한다. 또한 총기20(1991)부터 종령 특별 유시로 자녀가 잘 되어 나라의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자손 불공이 시작되었다. 상반기 49일 불공은 48(양력)에 회향된다. 회향일의 의미는 부처님오신날이 음력 48일이지만, 종단은 이를 양력으로 정했으므로 8일에 마친다. 총지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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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7:31

한민족의 큰 명절 『설』 그 의미와 유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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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법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고유의 역법으로 명절을 지냈다.

 

설날의 의미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대 조상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시 생활의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곧 도시 생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평소의 개인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설빔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는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날의 어원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먼저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 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의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고려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의 민속놀이

 

 

고싸움놀이

 

전남 광산군 대조면 질석리 윳돌 마을에서 매해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에 걸쳐서 벌이던 놀이다.

큰 줄을 꼬아 앞쪽에 고를 짓고 이것을 양쪽에서 밀어서 부딪게 한 다음 상대방의 고를 땅에 내려뜨린 쪽이 이기게 된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윷돌 마을이 황소가 쭈그리고 앉은 와우상이라 터가 거세기 때문에 이를 풀어주기 위해 시작하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마다 퍼져있는 이야기이다. 고싸움놀이를 줄다리기 놀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먼저 어린아이들의 고싸움으로 시작하여 다음날에는 청소년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청년들의 고싸움으로 커가며 마을 간의 대항전을 벌인다.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되었다.

 

 

 

 

널뛰기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력 정초를 비롯해 단오 한가위 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

마당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고 두 사람이 널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 이다. 널뛰기의 유래에 대해서 다만 그 놀이의 형태나 성격으로 미루어 폐쇠적 여성관이 자리 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의 여성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에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였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신분 연령의 구별 없이 즐겨오는 놀이다. 대가지를 가늘게 잘라서 연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여 연을 만들고 살에 매어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날린다. 때로 다른 사람과 서로 연실을 부며 끊는 연싸움을 하기도 한다. 연을 날릴 때 송액영복 이란 글자를 써 붙이는데, 이것은 질병 사고 흉년 등 나쁜 액운은 멀리 사라지고 복이 오도록 비는 마음에서 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된 것은 조선시대의 영조 때라고 한다. 영조왕은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했고 또 장려하였다고 한다. 정월에 연날리기가 성행하게 된 이유는 사계절 중이 때가 연날리기에 가장 적당한 바람 인 북서풍 이 부는 계절이다.

 

 

팽이치기

 

겨울에 시내 아이들이 얼음판위에서 많이 하는 놀이로 도래기치기라고도 한다. 팽이에는 아래쪽은 뾰족하게 깎고 위는 평평하게 깎아 만든 보통 팽이와 위, 아래 모두 뾰족하게 깎아 만든 불팽이가 있다. 얼음판이나 땅바닥에 손으로 팽이를 돌린 다음 가는 막대기에 헝겊 또는 삼실을 달아 만든 팽이채로 쳐서 세게 돌리는데 여러 아이들이 저마다 팽이를 힘껏 친 후 일제히 팽이채를 거두고 가장 오래 가는 팽이를 장원으로 뽑는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추억의 놀이가 되었다.

 

자료정리 =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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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7:29

총지종 사회복지재단 일원 어린이집 위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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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1일부터 정식 운영

 

불교총지종 사회복지재단이 서울 일원어린이집 운영을 위탁받았다. 총지종 사회복지재단은 130일 서울시 강남구청의 엄격한 자격 심사를 거쳐 오는 228일까지 밀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일원어린이집의 새로운 운영 단체로 불교총지종 사회복지재단을 지정했다. 정식 운영 계약 체결은 31일 강남구청에서 열린다.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 321번지에 위치한 일원어린이집은 199691일 개원하였다. 현재 하재희 원장 외 교사 13명과 종사원등 총 16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로서 총지종 사회복지재단은 서울시 강남구에만 두 곳의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총지종이 구현하는 생활의 불교화와 복지운영에 대한 종지를 다시 세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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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7:19

불교총지종 제106주년 원정대성사 탄신대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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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주년 원정대성사 탄신대제 봉행

 

*사진=훈향정공하는 서울, 경인 교도들

-종조님의 대원을 이어받아 화합종단의 기틀을 마련하자.

불교총지종 종조 원정 대성사 제106주년 탄신대제가 129일 원정기념관과 전국의 사원에서 일제히 봉행되었다. 효강 종령예하를 모시고 서울 경인교구 스승과 교도, 유가족 대표 등 약 300여명이 참석한 이날 법회는 개식사에 이어 스승 및 교도들의 헌화와 훈향 정공에 이어 효강 종령 예하는 고유문을 통해 만다라 세상에서 펼쳐지는 저희들의 작은 불사를 벅차고 환희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체만법은 모두가 법신불의 당체설법 아님이 없사옵니다. 부처님의 따사로운 자비로 늘 부처님 품안에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수행하는 자세로 살아감이 불제자의 도리인 줄 아옵니다.”며 원정 대성사의 탄신으로 정통밀교를 이 땅에 세운 큰 뜻을 찬탄했다.

인성 총무부장은 봉행사에서 밀법홍포의 대원을 저희 제자들에게 부촉(咐囑)하시며 세연을 다하고 입적하신지 사반세기가 지나 지금 이렇게 종조탄신 법회를 봉행함에 있어 돌이켜 생각해보니 원정 대성사님의 큰 뜻을 저희 제자들이 십분의 일도 따르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원정 대성사님의 대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종단은 종조님의 사상과 교상의 연구에 매진하여 종조님께서 제창하신 재생의세의 정신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총지종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용맹정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종조님께서도 저희들을 광명의 빛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지심으로 발원하옵니다.”며 종조님의 대원을 되새겼다.

김은숙 서울. 경인 신정회장은 복지구족하신 부처님과 대비원력 깊으신 종조님께서 다툼과 미움, 시름과 절망으로 어두워진 이 미망의 사바에 하루 속히 대 비로자나 부처님의 영원한 진리와 깨달음의 빛을 밝혀 주옵소서며 종조님 전에 간곡히 발원하였다.

서울.경인 마니 합창단의 축가를 끝으로 제106주년 원정 대성사 탄신대제를 마쳤다. 법회 후에는 효강 종령예하를 비롯하여 동참한 스승 교도들은 원정기념관에 전시된 종조님의 유품들을 관람하며 평소 검소한 생활과 수행정진에 한 치의 물러섬이 없던 모습을 되새겼다.

원정기념관=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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