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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8. 7. 14:57

제34차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 (백제문화권: 공주, 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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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차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 (백제문화권: 공주, 논산)

-전통불교문화 본존과 계승을 위해 양국이 노력하기로

 

34차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가 617일부터 19일까지 23일간의 일정으로 공주 일원에서 열렸다. 불교총지종은 통리원장 법등 정사, 총무부장 인선 정사, 재무부장 우인 정사, 사회부장 지정 정사, 교정부장 원당 정사, 밀교연구소 법경 정사, 서울. 경인 교구장 법우 정사, 대전 만보사 주교 승원 정사가 대표단으로 참가 하였다.

 

 

 

공식환영만찬

 

 

 

17일 오후 2시 조계사에 집결한 한국대표단은 환영 만찬 장소인 대전 리베라 호텔로 향했다. 오후 6, 양국의 대표단 수행원 등 약 200여명이 참석한 공식 환영 만찬이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먼저 한국 불교를 대표하여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부이사장 총화종 남정 스님은 오늘 환영 만찬회를 통해서 한일 양국의 불자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자비희사의 시무량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며 함께 기뻐 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기를 불보살님 전에 축원 드립니다.”라며 일본 측 대표단을 환영했다.

 

일한불교교류협회 이사장 니시오까 료꼬 스님은재작년 311일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큰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이만여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한국불교계의 다대한 위로와 두 번에 걸친 합동위령법요에 참석해 주셔서 희생자들을 회향해 주신 점을 진심으로 예를 올려 감사드립니다.”라고 한일 불교계의 우호와 동일본 대지진 참사 합동위령제에 대한 고마움을 전달했다.

 

이어 한국 측 부회장 조계종 향적 스님, 일본 측 부회장 모찌다 니찌유 스님, 안희정 충청남도 도지사(정무부지사 박정현 대독)의 축사와 교류회 한국 측 신도회 이희구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한국 전통의 타악공연과 승무 공연으로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이번 대회의 주관 사찰인 조계종 마곡사 주지 원혜 스님은 불교지도자들이 선한 마음을 나누는 우호적인 문화교류에는 신뢰와 평화를 쌓아 세계평화와 화해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선인들의 뜻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며 건배를 제의하고 다 같이 축원했다.

 

그러나 만찬 마지막 즈음에 한국 측 대표 조계종 보광스님, 진관스님이 일본 측 부회장 모찌다 니찌유 스님의 축사 중에 나온 삼국시대의 역사 중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관련 발언과 청일, 중일 전쟁 등 식민지 역사를 왜곡하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국 측 대표들은 즉시 사과와 발언 삭제를 요구하였다. 일본 측 발언의 당사자는 즉시 연단으로 나와 한국 측 대표들에게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하였다. 또한 발언을 자진 삭제한다고 행사 집행부에 요청했다. 같은 불조 혜명의 제자로 진리를 추구하는 양국의 대표들은 아직도 가깝고도 먼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자리였다. 만찬 후 한국 측 대표들은 숙소인 공주 태화산 전통불교문화원으로 이동했다.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 본 행사

 

 

 

618일 본 행사 대회 당일에는 충청 지역에 걸친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밤새 장대비가 내렸다. 기상청 발표에 의하면 행사 당일 공주 지역 시간 당 최고 50의 강우가 쏟아졌다.

오전 10시 불교전통문화원 다목적 홀에서 양국 사무총장의 공동사회로 본 행사인 세계평화기원대법회가 봉행되었다. 개회선언, 삼귀의례, 반야심경봉독과 양국회장스님의 헌화 순으로 이어졌다.

한국 측 회장 조계종 자승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전통불교문화의 계승과 보존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대회는 양국의 불교문화가 종교를 넘어 국가와 국민의 생활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핵심적인 사상이고, 삶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 대회가 양국의 불교전통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불교문화를 보다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대중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갰습니다. "라며 불교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통해 양국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자고 당부했다. 일본 측 회장 미야바야시 쇼겐 스님은 " 숱한 국난을 이겨내고 본 대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양국 불교도의 끊임없는 우호 친선의 덕분이며, 바로 계속의 힘이 불조의 힘을 받아서 오늘을 맞이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며 양국의 우호와 신뢰 관계가 더욱 더 발전되기를 서원 했다. 이어 한국 측 사무총장 홍파스님의 상축문과 일본 측 부회장 후지다 류죠 스님의 표백문 봉독, 양국대표자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세계평화 기원 대법회는 사홍서원을 끝으로 기념 촬영 후 끝났다. 잠시간의 휴식을 가지고 본격적인 학술세미나에 들어갔다.

 

전통불교문화 어떻게 계승 보전 할 것인가?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 공식행사인 학술세미나에는 한국 측 부회장 진각종 회정 통리원장은 인사말에서 " 양국 불교학자들의 공유된 가치는 '전통문화는 기초이자 민족의 정체성이며 문화산업의 핵심 키워드' 라는 사실입니다."라며 전통문화 보존과 계승발전의 과제를 통해 서로 공감하는 방향을 찾아 나가자고했다.

주제발표에서 한국 측 발표자로 나선 직지사 주지 흥선 스님은 "전통불교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대한 단상"이라는 주제로 발표하였고, 일본 측에서는 "동아시아에 유포한 정토교의 사상"에 대해 오자와 겐쥬 스님(대정대학 명예교수)의 발표가 있었다.

학술 세미나 후 에는 전통불교문화원 근처의 마곡사를 참배 할 예정이었으나, 폭우로 취소되고, 양국대표단은 저녁 만찬장인 대전 리베라호텔로 향했다. 여장을 풀고 6시부터 대연회장에서 열린 저녁 만찬은 양국 대표들이 자유로이 의견을 교환하고 우호를 다지는 자리였다.

 

일본불교의 어머니 백제 불교의 본고장 순례

 

이번 대회가 열린 충남, 공주 일원은 백제의 옛 도읍으로 찬란한 백제문화의 꽃을 피운 고도이다. 백제 성왕(서기 538)때 승려를 보내 일본에 불교를 처음으로 전한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도 승려와 불상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는 사신을 통해 불상만 전한 것으로 보인다.

첫 순례사찰인 천태종 대전 광수사(주지 김영제 스님)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오른쪽으로 석가모니 부처, 왼쪽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안치한 대적광전을 지상 3층에 모신 현대식 사찰이다. 광수사에서는 간단한 예불을 올리고, 다과를 같이 하였다. 광수사 다도회 회원들이 정성들여 만든 한국식 전통 다과와 차를 맛본 일본 대표단들은 정성에 모두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 순례지 는 공주 동학사(주지 유곡 스님). 동학사는 비구니 사찰로 강원이 설치 운영되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근거는 확실치 않고, 고려 태조 왕건의 명에 따라 도선 국사가 중창하였다. 보이지 않는 작은 곳까지 세심하게 배려한 비구니 스님들의 정성으로 가꾼 사원은 계룡산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둘러싼 한 폭의 그림이었다.

마지막으로 참배 한 곳은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백제국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황산벌을 눈앞에 두고 서있는 사찰은 고려 태조 왕검이 후백제의 마지막 군사 들을 소탕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 되었다. 지금의 개태사는 원래의 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창되었다. 개태사 주지 양산스님은 미륵전에서 있는 합동예불을 마치고, 일본 대표들에게 다포를 선물하며, 마지막 여로에 편안히 귀국하시기를 서원했다. 이로서 사흘간의 일정을 모두 마친 양국 대표단은 내년 제35차 일본 대회를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공주=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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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민속: 산신각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8. 7. 14:40

대관령 재궁골 국사 성황당과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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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재궁골 국사 성황당과 산신각

 

-대관령 성황이 된 범일국사와 산신 김유신 장군

 

 

해마다 음력 55일에 강릉 시내는 떠들썩하다. 양수인 5가 둘이나 겹쳐 일 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다. 농경문화 중심의 우리민족은 이날 파종제를 하늘에 올리고, 본격적인 모내기에 들어간다. 단오는 수릿날, 천중절, 중오절, 단양절 등으로 불렸다. 민간에서는 단오세시풍습으로 물맞이, 창포물에 머리 감기, 씨름, 그네뛰기 등 다양한 민속 몰이들이 펼쳐진다.

특히 강릉지역 단오제는 대관령 성황과 산신에게 제의를 올리고, 강릉으로 모셔오는 신주빗기로부터 시작된다.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허균

 

대관령 산신은 신라의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다. 이를 처음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학문의 기본으로 두고 있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있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를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로 불교의 진리에 깊이 심취했다. 또한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 없다고 당당히 밝혔다.

허균은 1603년에 명주에 머물며 단오제를 보고 기록을 남겼다. 김유신은 명주에서 공부하면서 대관령 산신에게 무예를 배웠고, 선지사에서 칼을 만들어 삼국을 통일했다. 그는 죽어서 강릉의 수호신,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대관령 산신에게 무술을 배웠다는 것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산악신앙의 숭배가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삼국유사에는 석탈해가 죽어 토함산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도 전해 신라인의 산신신앙의 단면을 알 수 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국사성황신은 산신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떻게 자리를 잡은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강릉 지역에서는 신라 고승 범일이 국사성황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범일 스님을 대관령 성황으로 밝힌 기록은 1931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 강릉군대관령 새신부분에 "대관령에는 한 개의 성황이 있는데, 즉 범일국사로서 강릉에서 출생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사성황인 범일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까지 활동한 고승이다. 강릉시 구정면 학산 출생으로 탄생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처녀가 해가 떠 있는 샘물을 마시고 태기가 있었고 아이를 낳았다. 처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 두려워 뒷산 학바위에 버렸으나, 학이 보살펴 기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키웠다. 국사는 비범한 외모와 뛰어난 학문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출가하여 신라 말에 국사가 되어 이름을 떨쳤다. 또한 죽어서 대관령 서낭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범일의 신이한 탄생과 모험 그리고 위인이 되고, 죽어서 신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영웅담처럼 차례로 보여준다. 일부에서는 범일을 뜰 범(), 해일()자로 쓰기도 하는데, 이는 신화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원명은 범일(梵日)이며, 국사성황이 바로 신라 고승 범일국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범일국사의 다른 모습

 

대관령 재궁골로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 산으로 오르는 길은 아니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진부와 횡계를 거쳐 강릉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횡계에서 내려야 한다. 지금은 복선화되어 새로 개통된 고속도로 덕에 2시간 정도면 도착이 가능하다. 횡계 지역은 시내버스가 드물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대절하여 재궁골로 이동했다. 대관령 휴게소로가는 구 도로를 이용하여 약 6KM 정도 가다, 대관령 목장을 지나 좌측으로 접어들면 재궁골이 자리한다. 대관령 능경봉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능선 아래 계곡이다. 재궁골은 이 계곡의 동쪽 숲속의 빈터에 위치한 아늑한 곳에 국사성황 범일국사를 모신 성황사, 산신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이 있고, 기도처인 칠성당과 샘물 용정이 모여 있어 '신터'라 불리운다.

주차장을 지나 관리동 좌측으로 성황사가 보이고, 그 뒤로 산신각, 용정, 칠성목() 이 자리한다. 때마침 단오를 맞아 성황사에서는 신주굿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자인 박수 무당이 조상신들에게 치성을 들이는 여인네를 성황신의 조력으로 재복을 비는 무속 신앙을 펼치고 있었다.

굿 판 너머로 보이는 성황신의 탱화는 기자가 상상했던 범일국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양옆으로 호랑이의 호위를 받으며 부관이 고삐를 쥔 백마를 탄 무관의 모습이다. 한손에는 활까지 쥐고 있다. 분명히 불교의 고승대덕의 모습은 아니다. 이는 무속 신앙인들이 바라는 모습으로 그형상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대관령의 성황은 인자한 고승의 모습보다는 나그네와 마을을 지켜주는 무장의 모습이기를 염원한 탓이라 추정된다.

성황당 뒤편으로 자리한 산신각에서도 나의 예상은 그대로 빗나갔다. 김유신 장군의 모습을 상상하고 전각 앞에 다다르니, 여느 산신각과 같이 긴 수염에 상투를 틀고 한손에는 부채를 쥐었다. 동자의 선도 복숭아 공양을 받으며 옆으로 호랑이를 옆에 두었다. 이 탱화 역시 산신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변한 김유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부채다.

 

유교와 무교의 절묘한 만남

 

 

 

강릉단오제의 가장 재미있는 상황은 재궁골 성황당 앞에서 벌어진다. 불교나 무속을 사이비로 치부했던 유교식 제사가 단오를 앞두고 이곳 성황신인 범일국사에게 올려 진다. 유교식제사에 이어 무교식 굿 판이 벌어지는데, 상극의 이념을 가진 두 제의가 서로 충돌할 것 같지만 재궁골에서는 이를 모두 포용하는 자리를 펼친다.

단오제의 제례는 신주빚기부터 산신제, 성황제, 봉안제, 영신제, 네번의 조전제와 마지막으로 송신제 까지 9번의 제례를 지낸다. 제례를 지내는 형식은 모두 같은 절차에 의해 진행되고 신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제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강릉 단오제는 산행길의 안전이나, 바다를 접한 동해안 주민들의 풍어, 집안의 태평등을 기원하는 제의와 민속놀이의 전통 문화 요소들이 잘 보전되어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재궁골 역시 강원도 평창군에 속하지만 강릉시가 지역을 임대하여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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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4:22

불교 총지종 괴산 수련원 중원사 착공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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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팔엽원 비로자나 부처님 중심에 진언밀법도량 건설

-불교 총지종 괴산 수련원 중원사 착공 불사

 

불교총지종의 오랜 숙원 사업인 괴산 수련원 건립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 389-11번지 일대, 가령산 자락 총지종 수련원 자리에 서원당과 숙소, 공양간 등이 들어선다.

411일 오후 2시 중원사 착공지진불사가 총지종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 정사, 대전 만보사 승원 정사, 중원사 정정심 전수, 청주 혜정사 진일심 전수, 광주 법황사 혜안정 전수 및 총지화, 사홍화 기로스승이 동참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만보사 승원 정사의 집공으로 총지종 의궤에 따라 진행된 지진불사에서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 정사는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괴산 수련원 서원당 건립을 염원하는 스승님과 교도 분들의 불공 공덕으로 오늘 역사적인 첫 삽을 뜨게 되었습니다. 총지종의 정통 밀교 진언 염송 수행의 성지가 되기를 서원합니다.”며 공사의 원만 성취를 서원했다. 이어 착공식에서 스승들은 첫 삽을 뜨며 모든 공사가 사고 없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비로자나 부처님께 서원했다.

총지종 금강성지(金剛聖地)인 괴산 수련원 중원사는 태백산맥에서 남동쪽으로 내달리는 소백산맥의 가운데 솟은 속리산지맥인 가령산자락에 위치했다. 지형 상으로 둥근 분지를 중심으로 팔방에 연꽃잎이 둘러싼 형태이며, 봉우리마다 수많은 전설이 묻혀있다. 특히 태장계 만다라의 중대팔엽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형상의 지세는 총지종 수행 도량 건립지로 최적의 명당이다.

괴산=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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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기행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58

고도기행(古都紀行)- 경주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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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기행(古都紀行)

 

이번 호부터 특집으로 한국의 고도를 탐방 한다. 고도(古都)의 정의는 글자그대로 옛 도읍을 말한다. 우리역사의 옛 도읍으로는 서울(한양), 평양, 경주, 부여, 공주, 김해를 대표적인 고도 볼 수 있다. 도시는 나름대로의 환경적, 정치적인 용인에 따라 형성된다. 자연 환경의 대표적인 필수 조건은 용수의 공급을 위한 강()과 식량의 공급과 거주지로 충분한 넓은 평야를 들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고도 역시 위의 필수요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총지종보는 불자들에게 고도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진언밀교의 흔적들을 찾아 소개하고자 한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최신 통계와 최근의 문화 유적 조사를 최대한 활용하여 글을 실고자 한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1: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慶州)

특집 순서

경주의 역사와 오늘

불국토 남산의 유적

진언 밀교의 흔적을 찾아서

불교총지종과 경주

 

 

경주의 역사와 오늘

 

경주의 자연 환경

 

경주시는 동쪽은 동해, 서쪽은 청도군과 영천시, 남쪽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북쪽은 포항시와 접하고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영천경주간 형산강구조곡(兄山江構造谷) 교차하는 지점에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침식 분지가 된 지점에 시가지가 발달하였다. 시 전체 면적은 1,324.39이고, 인구는 269,343(2008년 인구통계)이다.

명활산(明活山), 금오산(金鰲山),옥녀봉(玉女峰), 선도산(仙挑山), 소금강산(小金剛山m) 등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는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경주양산간 구조곡도 경주 도심지에서 교차하여 거의 시 전역이 형산강의 상류·중류부에 해당된다. 지역의 기후는 기온 교차가 비교적 심한 내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경주의 역사

 

객관적인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볼 때 사람이 살게 된 것은 청동기시대라고 추정된다. 청동기 이전에 해당하는 유물·유적이 아직은 발견된 바 없고, 고인돌, 청동검, 간돌 칼(마제석기) 등을 부장한 무덤 등 이 시기 유물·유적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구정동, 평동 입실리 유적 등은 우리나라 후기 청동기문화를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특히 조양동 유적은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일찍기부터 이 지역은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원래 사로 6촌에서 비롯되었다. 이 촌락국가는 기원 전후 무렵 사로국(斯盧國)으로 발전하였으며, 점차 진한 12국의 맹주국(盟州國)이 되었다. 그 뒤 사로국이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그 영역이 확대되자 6촌은 6부로 바뀌고 이들의 지역은 왕경으로 발전한다. 경주는 궁실과 각종 관청이 들어서고 지배층이 거주하는 도시로 발전하였다. 통일 이후의 전성시대에는 178936호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935(태조 18) 신라가 고려에 항복할 때 까지 경주는 통링 신라의 왕경으로 그역활을 한다. 1238년에는 몽고군이 이 지역을 휩쓸어 황룡사구층목탑이 불타는 등 수많은 문화재의 손실을 입었고, 1308(고려 충렬왕 34) 계림부 이름이 바뀐다.

조선 개국 후 8도체제가 확정되면서 이곳에 경상도의 감영이 두어졌으나 1408(태종 8) 무렵 감영이 상주목으로 옮겨졌고, 1415년에 경주부로 개칭되었다. 조선 후기에 동성(同姓) 마을이 많이 형성되었는데, 양동의 이씨(李氏)와 손씨(孫氏)는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곳 출신 최제우(崔濟愚)가 인내천(人乃天)의 동학사상을 창시하여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경주는 역사적 사건 만큼이나 많은 유물·유적을 남기고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물·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만도 국보 31(불국사삼층석탑 일괄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73, 사적 및 명승 77개소, 천연기념물 3, 중요민속자료 16, 중요무형문화재 2종이 지정 되어 있다.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 경주

 

 

교육·문화의 고도인 경주의 일찌기 신라의 화랑도와 682(신문왕 2)에 국학(국립대학)이설치되었다. 국학은 고려시대 경주향교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는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서원으로는 서악서원(西岳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은 구강서원, 인산서원, 매월당영당, 운곡서원 있다.

경주가 경북 남부의 교육 중심지로 그 명맥을 지금도 유지 한다.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2009년 기준으로 유치원 63개 원, 초등학교 46개 교(분교 8개 교), 중학교 20개 교, 고등학교 20개 교의 초,중등 교육기관이 있다.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있으며, 전문대학 1개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경주대학교·위덕대학교 등 3개의 대학교와 특수학교 1개 교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문화박람회인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3년마다(8~11) 보문관광단지 내 엑스포공원에서 개최되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신라문화제는 매년 10월에 개최로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해는 같은 시기에 개최한다. 전국국악대전, 신라미술대전, 한글백일장, 화랑씨름대회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이밖에도 청마백일장, 목월백일장, 원효예술제, 만파식적제, 동학예술제 등이 열리고 있다. 특히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에서는 신라문화학술회의개최와 전문학술지인 신라문화를 간행하여 경주의 역사·문화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런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집결지로 경주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10대 문화 유적의 도시로 지정 되었다. 경주=특별 취재단, 사진제공=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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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새 대통령께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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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께 바란다

 

-화합과 소통으로 진정한 문화 강국이 되기를

 

지난 한해는 우리나라의 국운을 결정 짖는 중대한 선거가 두 번이나 있었다. 4월에는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 선거와 12월에는 대통령을 뽑는 총선이 이어졌다.

먼저 새로 취임한 대통령께 축하의 인사와 부처님의 가지력이 충만하시기를 서원한다.

우리나라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국가다. 헌법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첫째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둘째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영토의 보전·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세째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정하고 있다. 그만큼 국가를 책임지는 중책의 자리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광복을 맞은 우리민족은 극단적인 좌.우 대립을 거쳐 나라가 분단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거쳤다. 강대국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다. 그 후에도 한번의 4.19혁명과 5.16을 거치면서 고도 경제성장 시기를 거쳐, 민주화의 험난한 파도를 넘어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선진국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정부는 아쉬운 점이 참 많은 정부다. 선진국으로의 진입과 중산층의 확대 및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약속하고 출범했다. 그러나 4대강사업 이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사업 등 국민의 합의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하고 강행한 부작용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있다. 평행선으로 치닫는 남북 관계는 북한의 삼대세습과 핵실험으로 엉킨 실타래 마냥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 이라는 막중한 직무를 어께에 짊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지혜로운 정치가 열리기를 바란다.

오늘은 불교인의 한사람으로 새 대통령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리고자한다. 매번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들이 가장 많이 내세운 공약이 국민 대통합이나, 대화합이다. 해방이후 이데올로기 분쟁으로부터 민주화 운동,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서민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이 먼저였다. 그러나 지금 까지는 화합보다는 분열을 이용한 정권유지에 급급했다고 본다. 늘어만 가는 빈부의 격차와 계층의 대물림은 우리 사회를 1%의 귀족이 지배하는 왕권 및 봉건의 역사로 되돌리는 무서운 결과를 낳을 것이다. 부디 정권을 창출한 세력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이익과 화합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란다.

둘째로 서민경제의 활성화이다. 골목과 시장의 상인들이 일할 맛이 나야한다. 대형마트의 무차별적인 공세는 동네 구멍가게의 추억 빼앗아갔다. 대통령께서 공약하신 경제민주화의 실현만 잘 지켜주신다면 서민경제의 활로는 반드시 열릴 것이다.

세 번째로 문화 정책의 근시안을 버리고, 장기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시기를 바란다. 현재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 삼국은 독도나, 랴오닝섬 등 해상영토분쟁이 한층 가열화 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역사왜곡정책인 동북공정의 계략도 숨 가프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 즉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는 한류의 지원을 위해 많은 자금과 인원을 투입했다. 또한 많은 부가가치를 올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상업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장사가 안 되면 어떤 한류도 받아들이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서양 대중문화의 기본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지금의 한류는 창조된 우리 문화라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우리 전통 문화와 역사를 화선지이 배경으로 깔아두고 진정한 한류의 창작품을 그려내기 바란다.

끝으로 공정한 종교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지난 정부 초기에 있었던 정부와 불교계의 마찰은 종교라는 특수한 신앙체계에 대한 이해부족과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이번 대통령께서는 불교계를 전통종교로서 특별한 대우를 해달라는 주문이 아니다. 국민 누구에게나 종교의 자유는 있다. 그러나 인원으로, 사원이나, 교회의 숫자로 그 종교의 면면을 봐서는 안 된다. 불교만 해도 많은 종단들이 있다. 대통령께서는 신도의 숫자로만 종교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나눔의 정책을 골고루 펴기를 바란다. 그러면 다문화사회에 이미 진입한 우리 후손들에게 다양한 종교문화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남겨줄 것이다.

 

오늘 아침 일간지에도 새 정권의 순조로운 출발을 알리기보다는, 국민의 이익을 앞세우며 치열한 싸움을 하는 소식들로 지면은 채워졌다. 정치에서 내일은 없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주 법계의 제불 보살님들과 국민들은 간절히 손을 맞잡고 화해하고, 협상하는 모습을 바랄 것이다. 부디 5년이라는 재임 기간 동안 따사로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국정을 펼치기를 비로자나 부처님 전 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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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5

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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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최근 공영방송 KBS에서는 1,2TV를 통해 한국의 유산-운암 김성숙이 방영되고 있다. 정식 다규멘타리는 아니지만 프로그램 막간 팝업으로 인기가 높은 코너이다.

몇 장의 사진과 간단한 코멘트가 전부지만 운암 김성숙은 승려 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임을 확실히 전해준다.

스님이자, 항일투쟁가, 사상가, 저술인, 대학교수 등 파란만장한 태허(太虛)스님의 일생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봉선사서 수학하다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해방 후에는 반이승만 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재야운동에 참여했다. 말년에 가난과 병고와 싸우다가 쓸쓸하게 입적하면서도 그가 했던 말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였다. 어쩌면 평생을 은산철벽을 무너뜨려 도를 이루듯이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곧은 한길을 간 것은 아닌가?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무작정 가출 그러나 부처님 법연이 먼저였다.

 

태허스님은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성숙(星巖), 아호는 운암, 성숙은 법명이다. 자식이 없어 고심하던 그의 어머니는 미륵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스님을 얻었다. 어린 스님은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글방에 나가 한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 전국 곳곳에 독립학교가 설립됐다. 스님의 고향 철산에도 대한독립학교가 세워진다. 10살 때 입학한 스님은 그곳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등 외부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 하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학교는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섰다. 태허스님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그 무렵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낸 백부가 스님의 집을 찾아왔다. 백부는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백부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어린 스님은 자신도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간에 실린 스님의 회고는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스님은 만주로 향했다. 중국어를 몰랐던 그는 중국어를 안 쓰고 만주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건너가는 길을 택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 붙잡혀 여관에 붙들려 있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님은 출가한다.

그가 원산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부처님오신 날이었다. 원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강사로 구경을 가고, 시내가 텅 빌 정도였다. 스님도 여관주인을 따라 서강사로 갔다. 다음날 새벽 산책하던 중 그는 스님을 한명 만났다. 여관주인에게 벗어날 심산으로 스님에게 말을 물었다.

 

여보시오, 스님.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출가하려 하느냐?”

경전을 연구하려고요.”

 

스님은 자신을 양평 용문사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을 따라가면 출가할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그길로 용문사로 가서 출가 하고, 그곳에서 26개월 정도 수학했다.

 

그런데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커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초보 중노릇을 하는 모든 방법을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스님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스님(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은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224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스님(1879~1944)도 만나게 된다.

 

스님의 회상이다.

 

노스님은 손병희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스님은 손 영감이 오면 나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졌다. 만해스님과 김법린(1899~1964)도 자주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때 이름이 널리 나 있었다.”

 

봉선사에 머물면서 손병희, 만해스님, 김법린 등과의 인연으로 스님도 3.1운동에 가담한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선지 5년만의 일이다. 그는 봉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사상이 퍼져있었다. 만주, 상해,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해 비밀리에 사회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스님도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 가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김규하.김봉환.김정완.윤종묵.차응준스님 등 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북경에 도착한 그는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장건상(張建相. 1882~1974), 양명(梁明), 장지락(張志樂. 1905~1938)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던 그는 1926년 광동으로 가 광동코뮨에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임정을 떠났다.

 

좌우의 이념보다 민족의 해방이 우선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에 뒀던 스님,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되는 날까지 숨 가쁘게 투쟁해왔던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 좌익인물이라는 낙인, 그리고 박해였다.

19615.16 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혁신당의 리더로 활약해,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나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석방될 수 있었다. 이 때 부터 그를 도와주던 손길도 끊어졌다. 정권의 눈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 때 운허(耘虛)스님(1892~1980)은 가끔 쌀을 보내 스님의 생계를 도왔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태허스님.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그가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받쳤다. 정부는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태허스님은 만해스님. 김법린과 마찬가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는 이가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공양한 태허스님이 제대로 추모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자료제공= 운허 김성숙 기념 사업회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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