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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4:25

불교총지종 대만불교연수 동행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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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 대만불교연수 동행 참관기

불교총지종이 창종 이후 처음으로 전 현직 스승들을 대상으로 대만불교연수를 다녀왔다. 1, 2차로 나누어 다녀온 이번 연수는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하나라도 더 체험하려는 열기로 45일 전 일정이 열기로 가득했다. 스승님들과 함께 수행한 교무들도 많은 것을 함께 배우고 나누 뜻 깊은 시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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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 대만불교연수단 133(단장: 지성 통리원장)은 통리원 2층 반야실로 모여들었다. 총지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기획한 대만 불교연수의 사전 미팅을 가지기 위해서다.

이인옥(국제불광회 한국 사무 부총장) 선생의 일정 소개와 함께 대만의 불교 현황과 규모에 대한 간락적인 브리핑을 받았다.

지성 통리원장은 인사말을 통해이번 연수는 관불과는 확실히 다른 성격의 여행입니다. 세계불교계에서 그 위치를 확실히 굳혀가는 대만 불교의 현실을 둘러보고 종단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구해야 합니다. 종령님께서도 특별히 몇 가지의 과제를 내려주셨습니다. 이번 연수를 통해 한발 앞선 방편으로 조직적 발전을 이룬 대만불교의 장점을 잘 배워오기를 당부 했다. 또한 연수를 끝내는 시점에 주어진 주제에 대한 보고서를 모두 제출 하도록 하였다.” 참가하는 스승님들은 재차 결의를 다지며 가슴으로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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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30분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제1차 연수단은 해외로 떠난다는 설렘 보다는 연수 일정을 잘 소화 할지 모두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이전에 종단을 대표하여 불교계 공동으로 참가했던 해외 행사와는 달리 무언가를 배우러 간다는 긴장감은 노소를 떠나 모두에게 공통되는 느낌이다.

발 빠른 교무들의 안내로 무사히 짐을 부치고, 출국장을 빠져 나와 탑승구로 향했다. 예정에는 중화항공편을 이용하기로 했으나, 항공사의 사정으로 제휴사인 대한항공을 편을 탑승했다. 부처님의 작은 배려일까? 총지종 연수단의 편안한 여행을 위해 우리나라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하신 걸까? 모두들 부처님의 가지력이라 믿고 먼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기내에서 제공하는 기내식으로 점심공양을 대신하고, 예정된 시간인 현지시간 12시 정각에 타이페이 타오웬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우리의 인천과 김포공항의 규모가 워낙 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지방의 작은 공항에 내리는 느낌이었다. 한때는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공항으로 대만의 국부인 장제스공항으로 불리던 중화민국 최고의 관문이었다.

입국장으로 가는 길은 공사 중이라 임시 칸막이로 막혀있었다. 우리나라 지하철 역 공사 현장의 느낌을 여기서 왜 받는 걸까? 공항을 나서자 숨이 턱 막혔다. 역시 더운 지역이었다. 대만의 북부 지역인 타이페이가 이리 더우면 남부에 위치한 불광산사 이나, 까오슝 지역의 날씨는 완전히 열대의 기후를 맛볼 것 같다. 그래도 이국이라는 설레임이 앞선다.

현지 가이드가 마련한 관광버스에 올라 첫 방문 사찰인 타오웬의 불광산사 소속 금광명사(금광명사)로 이동했다. 중간 중간 야자수도 보이고, 우리의 지방 마을로 향하는 느낌이다. 금광명사는 불광산사의 타이페이 지역 거점 사찰로 지역 주민의 교육과 수행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철저한 계획 하에 건립되었다.

사찰에 도착하자 사원의 주지스님이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사원의 규모가 크다. 타이완의 국토 면적이나 인구수에 비하면 크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륙에서 온 스승을 모셔서인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정방형으로 가운데 중정을 두고, 정면에 대웅보전을 둔 콘크리트로 지어진 4층짜리 건물이다.

회랑을 끼고 양옆으로 교실들과 활동 공간들이 들어서있다. 먼저 대웅전에 들러 참배를 드렸다. 옥석으로 조성된 본존은 언 듯 보아 대륙의 운강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의 상호를 연상시킨다. 좌상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비례가 조금은 안 맞아 보인다. 우리 석굴암 부처님의 완벽한 비례가 눈에 익어서 인가 어색하다. 이인옥 선생의 통역으로 금광명사의 교육 시스템과 지역에서의 역할등을 안내받고, 사원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먼지 한 점 찾아볼 수 없다.

대웅전의 벽면에는 이 사원을 건립 할 당시 모연에 동참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뭇잎 모양의 타일에 새겨져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사원 창건비에 빼곡하게 이름을 새겨 넣었을 법한데, 발상이 특이하다. 전체적인 느낌은 현대적이지만 장엄함을 잃지 않은 도심 전통사원의 모습이었다. 주지스님과 자원 봉사자들의 상냥한 미소를 뒤로하고 연수단은 두 번째 방문 사원인 불광산 타이페이 도량으로 차를 달렸다.

타이페이 번화가인 송륭(松隆)로에 자리한 타이페이도량(佛光山臺北道場)은 겉은로 보기에는 평범한 상가 건물이다. 10여층 정도로 보이는 건물의 입구 층에는 패밀리레스토랑이 자리했다. 6개 층을 사용 중이었다. 먼저 법당에 들러 참배부터 올렸다. 이곳 주전은 여래전으로 다섯 분의 부처님을 모셨다.

도심 사원이라 규모는 크지 않지만 법당 장엄에 많은 정성을 쏟은 공력이 느껴졌다. 법당 옆으로는 불교용품점이 들어있다. 이곳은 복합 기능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건물을 한 층씩 매입하여 위성방송국, 국제불광회본부, 미술관, 교육공간 등을 배치했다.

불광산사는 일간신문과 위성방송국을 운영 중이다. 일간 인간복보(人間福報)는 타이페이를 대표하는 신문으로 중화 항공 기내에서도 제공되고 있다. 특히 이 신문은 사건, 사고 위주의 기사를 탈피해, 생활 속의 미담 등을 주로 소개해 따뜻한 정을 전하는 신문으로 유명하다. 위성 방송은 24시간 전파를 쏜다. 주로 법문, 미담, 전통문화, 다큐멘타리 등을 편성한다. 간혹 불교와 관련된 드라마를 편성하기도 한다.

그런데 광고가 없다. 운영비 전체를 불광산 신도들의 보시로 운영 된다. 광고가 없다면 그만큼 편성이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지않는다는 뜻이다. 그저 부러울 뿐이다.

제작 스튜디오와 주 조종실등 관련 시설을 둘러보는데, 100% 디지털화 되어 메인 서버는 증권사 전산실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또 다른 층에는 불광산사를 움직이는 신도조직, 국제불광회 본부가 있다. 아시아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조직 되어 있는 불광회는 봉사, 포교를 목적으로 한 신행단체로 독특한 조직 구성과 운영으로 가장 모범적인 단체 운영으로 유명하다. 자원 봉사자들이 입은 전통의상은 단아하면서도 불광산사의 조직의 견고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아이콘이었다.

자원봉사자로 임명되기 까지 수많은 관문을 거쳐야 한다. 우리네 어느 동네 불교처럼 보시금의 규모로 회장되고, 부회장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철저히 을 지어 업장을 소멸하기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성운대사가 창립한 불광산사는 대만을 대표하는 불교 문파다. 선불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인간 속으로 들어와 따뜻한 공동체를 이룬 대사의 높은 뜻에 다시 감탄한다.

아침 630분에 서울 총지사에서 출발하여, 2시간 반을 날아 이국땅에 왔고, 쉴 틈 없이 두 군데의 사찰을 둘러보았다. 더운 날씨와 강행군으로 조금은 피곤했지만, 모두들 만족스러운 첫날을 보냈다. 오후 8시 저녁 공양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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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페이에서의 아침을 맞았다. 호기심에 창문을 열어보니, 모두들 출근 준비로 분주하다. 거리는 자동차보다 스쿠터들이 더 많다. 아니 자동차가 스쿠터들 틈에 한 대 정도 끼어 있는 듯했다.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타이완의 인구보다도 스쿠터의 수가 많다고 한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연수단은 대만의 중부지역 화련에 위치한 자재공덕회를 방문하기위해 타이페이역으로 향했다.

타이페이 도심의 기차역은 대규모 쇼핑몰과 같이 있다. 하지만 열차의 출발과 도착은 지하에서 이루어 졌다. 우리나라 지하철역과 똑같은 구조다. 하지만 간선 기차가 드나들어 선지는 모르지만, 공기가 답답하다. 우리나라의 새마을호 정도의 열차를 타고 우리는 타이페이를 빠져 나왔다.

화련으로 가는 중 바다를 볼 수 있었다. 태평양이다. 바다의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 중간 중간 세멘트 공장을 볼 수 있었다. 화련 지방은 유명한 석회석 산지다. 석회석이 오래 묵으면 화강암이 된다. 화강암이 다시 오랜 시간을 지나면 대리석이 만들어진다. 오늘의 일정 중 대리석 계곡이 있다. 과연 어느 정도이기에 국립공원으로 지정까지 되었는지 궁금하다.

2시간 반을 이동하여, 화련역에 도착했다. 조용하다. 우리네 시골역 같은 느낌이다. 아침 무렵 오락가락 하던 비는 그치고, 열대의 햇살이 머리위로 내리쬔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자재공덕회를 방문했다. 먼저 병원 앞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병원 로비를 통해 자재공덕회 본부인 정심당으로 이동했다. 병원로비의 환자를 돌보는 부처님상이 모자이크화로 한쪽 벽면을 장엄하고 있었다. 병원의 자원 봉사자들이 매일 아침 이 불화 앞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예불을 올린다 한다. 이곳은 자재공덕회의 본부로 쓰이는 정심당과 병원, 의과대학 등이 들어서있다. 역시 크다. 대륙이라 그런가? 다시 한번 고개가 갸우뚱 해진다. 자재병원은 스님들과 빈민들에게는 모든 치료가 무료로 행해진다. 특히 외국인 스님들도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곳 병원이 자랑하는 시설 중의 하나가 세계최대의 골수은행이다. 타이완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나 골수가 필요한 환자들에게 제공 된다.

자재공덕회 기념관은 지하층에 자리했다. 역시 자원봉사자들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한다. 모두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안내에 따라 전시관으로 이동하여 증엄 스님의 출가와 구도, 자재공덕회의 조직구성 등을 이인옥 선생의 통역으로 들었다.

처음 전시관을 들어서 길어야 삼십분 정도면 관람이 끝나리라 예상했다. 아니었다. 전시관을 다 둘러보는 데만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 전시관은 하나의 시나리오를 따라 자제공덕회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상까지 제시한다. 특히 긴급 구호단체를 표방하는 자제공덕회는 아이티 대진진이 나자 바로 다음날 전세기로 현장에 도착했다 한다. 놀라울 따름이다. 이곳의 스님들은 철저히 계를 지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원으로 부터는 기본적인 것만을 제공 받을 뿐 모든 생활은 자신이 스스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불자들이 내는 보시금도 반드시 사용처를 기재 해야만 받는다. 자재공덕회 긴급구호사업의 재원 마련 방법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원재활용 사업이다. 지역의 재활용품을 수집하여 환경도 살리고, 재원도 마련하는 방안이다. 무의탁 노인들이 길거리를 해매며 박스를 수집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다르다.

자제공덕회의 구제사업은 종교, 국경, 인종을 구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대자 대비의 정신을 실천하는 단체이다. 전시관을 둘러본뒤 법당으로 올라같다.

처음에는 교회인 줄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기독교 적이다. 전면의 불화는 증엄스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이다. 관세음보살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자제공덕회 신도들의 눈에는 증엄스님은 이미 관세음보살이상으로 존재하는 듯 했다. 이 법당에서 한 가지 주목 할 점은 의자에 있었다. 절도하고, 경전을 봉독하는 독서대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의자를 만든 것이 신기 할 따름이다. 공간의 다양한 활용이 눈에 들어온다. 연수를 마친 후 연수단은 자재공덕회로부터 약 30분 거리에 있는 태로각대리석 계곡으로 향했다. 잠시나마 연수의 부담을 놓고 타이완의 자연을 맞으러 간다. 계곡으로 가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 하다. 이 깊은 산속에 누가 길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대륙으로부터 밀려 나온 장제스 군대는 여러 번 대륙으로의 복귀를 노렸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장제스는 유휴 군인들을 동원하여 대만의 동서를 있는 도로를 만들라 명령한다. 수많은 군인들이 이 험한 협곡에서 목숨으로 길을 만들었다 한다. 제주도의 5.16도로가 떠오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 후 전국의 깡패들을 국토건설단으로 동원 한라산을 관통하는 도로를 만든다. 조금은 다르지만 많이 비슷한 점을 느낀다.

협곡은 평균 수십미터에 이른다. 산 정상 쪽으로 갈수록 하얗게 배를 드러낸 대리석 들이 장관을 이룬다. 그런데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관광객을 실은 차량의 엔진소리와 인파들로 자연의 소리가 묻힌 것이 못내 아쉽다. 관불을 마치고 저녁 공양을 위해 화련역으로 갔다. 모두들 맛있게 공양을 들었다. 첫날에는 강한 향신료 냄새로 음식이 입에 낯설었다. 그래도 하루를 지냈다고, 이제는 먹을 만하다. 다시 2시간 반을 열차로 타이페이에 돌아왔다. 호텔에 들어서자 작은 이벤트가 준비되었다. 오늘이 대구, 경북 교구 교구장 지공정사님의 생신인 것이다. 호텔 로비에서 간단히 케익을 자르고 스승님의 건강을 서원했다. 먼 길을 다녀왔지만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왔다. 내일은 타이페이를 떠나 대만의 남부지방으로 간다.

취재=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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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4:10

총지종 총기41년 춘계 승단총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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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종회의원 보선, 스승 평상복 시연

 

총지종은 총기41년 춘계 승단총회를 425일 홍천에서 개최했다. 효강 종령 예하의 주제로 열린 승단총회는 지성 통리원장을 대신해 인선 총무부장의 사회로 열렸다. 이번 승단 총회에서는 총기 40년 예 결산 수지 보고, 중앙종회의원 보선, 스승 평상복 복식 시연 및 종단 현안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중앙종회의원 보선에서는 종단 4년 이상 근속자 및 5급 이상 후보 자격이 있는 스승을 대상으로 투표로 실시하였다. 이날 선거에서는 전주 흥국사 주교 지정 정사와 법황사 혜안정 전수가 종회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임기는 잔여임기인 총기 426월까지이다.

이어 총지종 스승들의 일상복 복식 제정을 위해 종단이 만든 예비 복식에 대한 발표와 의견 수렴이 있었다. 이번에 예비적으로 선보인 복식은 두 종류로 정사들의 평상복으로 전통 승복 형 두루마기 한 종류와 전수들의 원피스 형 한 종류가 선을 보였다. 통리원은 이번 총회를 통해 모아진 스승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종지와 교리에 맞는 디자인을 선택해 복식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방침이다.

효강 종령 예하는 총평을 통해 오늘 선출 되신 중앙종회의원들은 종단의 주요 사업을 심의 결정 하는 시금석과 같은 역할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총회에서 모아진 의견을 바탕으로 올해의 종단 사업계획이 원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며 승단 총회의 결과가 통리원 업무에 잘 반영되기를 서원했다. 홍천=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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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4:04

제79회 춘계강공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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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용맹정진의 수행과 교화에 임하자.

 

총기 41년 불교총지종 춘계강공회가 424일부터 26일까지 강원 홍천 대명비발디 파크에서 봉행되었다. 전국의 기로스승을 비롯한 총지종 승단은 24일 통리원 인선 총무부장의 집공으로 개강불사를 봉행했다.

3.7 의궤에 이어 불교 총지종 효강 종령예하는 법어에서 참석하신 여러 스승님들은 종조님의 창종 정신과 강공회의 의미를 확실히 되새기는 자리여야 합니다. 불교 종단의 흥망성쇠는 승직자에게 달려있습니다. 종단의 성쇠는 승직자들의 수행 여하에 결정됩니다. 오늘 일흔 아홉 번째 맞는 강공회 개최하지만, 종조님 당시의 강공정신은 갈수록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종조님의 창종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강공은 전 승단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자리입니다. 강공의 모든 일정을 통해 우리들의 수행력과 법력을 증장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승직자 본연의 서원은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하는 대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번 강공을 수행하여 종단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를 바랍니다.”며 춘계강공을 통해 스승 본연의 자세를 되새기기를 당부하였다.

지성통리원장은 인사말을 이번 4월에는 2주에 걸쳐 대만불교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피곤하신 가운데 참석하신 스승님들에게 감사드리며, 이번 강공을 통해 해외 연수를 통해 배우고 느낀 모든 것을 잘 정리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 합니다.”며 원만한 강공이 되기를 서원했다.

이어 효강 종령 예하의 특별 정신교육이 이어졌다.(종령 정신교육 전문 5) 이번 강공은 외부 초청강사 없이 밀인사 원당 정사의 대승엄보왕경의 관음신앙 고찰, 화령 중앙교육원장의 아자와 아자관, 밀교연구원 법경정사의 염송과 불공법강의가 있었다.

또한 지난 42차에 걸쳐 진행된 대만불교연수 소감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각 교구별로 한명씩 연수 소감을 발표했다. 부산, 경남 교구는 운천사 도현 정사, 대구, 경북 교구는 단음사 지현 전수, 충청, 정리 교구는 만보사 승원 정사, 서울 경인 교구는 총지사 법등 정사가 대만 연수에서 체험한 소감과 도입 가능한 방안들을 발표하였다. 전국의 스승들은 토론과 발표 위주의 이번 강공프로그램을 준비한 통리원 측에 감사를 표하고, 각 사원으로 돌아가 강공을 통해 얻은 교화의 방편을 실행하기를 비로자나 부처님 전 서원 하였다. 강원 홍천=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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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3:47

총지종 승단 대만불교 연수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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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사원과 엄격한 계율로 홍포의 나래를 편 대만불교

 

 

-총지종 승단 대만불교 연수 봉행

불교총지종은 통리원 주관으로 전국의 현직 교화 스승들을 대상으로 410일부터 2차에 결쳐 대만불교연수를 실시했다. 1차 연수단(단장 지성 통리원장, 부단장 인선 총무부장)410일부터 14일까지, 2차 연수단(단장 화령 중앙교육원장, 부단장 대원 정각사 주교)417일부터 21일까지 다녀왔다

이번 연수는 불교총지종이 창종 40주년을 맞아 종단 발전의 획기적인 발전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대만의 3대 사원인 불광산사와 소속사원, 중대선원, 자재공덕회를 방문하고 사원 시설과 포교, 사회복지, 문화프로그램 현황을 살폈다. 특히 불광산사에서는 새벽예불부터 발우공양까지 현지 스님들과 똑같은 수행 체험을 하였다.

총지종 지성 통리원장은 이번 연수는 총지종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한 방편입니다. 대만의 도심 사원 운영의 노하우와 승단의 엄격한 계율 체계를 우리 종단의 현실에 맞게 연구 하려 합니다.”며 전 승단이 하나가 되어 제2의 창종을 각오로 이번 연수에 임했다.

타이완=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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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2. 3. 6. 14:26

특집-불교와 3.1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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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3.1운동


조선 독립의 의지로 전국의 불자들이 하나 되었던 그 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라는 제국주의에 온 백성이 분연이 일어나 항거한 3.1일 운동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만큼 3.1운동은 온 겨레가 공동으로 발원하고 저항한 거대한 민족사의 혁명이었다. 또한 그 운동의 주역으로 불교는 가장 먼저 일어나 선봉에 섰다.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가로 백용성 스님, 한용운 스님 등은 3.1 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한 민족의 대표였다. 3.1운동 92주년을 맞아 두 선사의 삶을 통해 불교계와 3.1운동을 돌아보고자 한다.

민족대표 33인과 대각사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에 위치한 ‘대각사’는 한국 근세 불교의 흐름에 있어 안국동 선학원과 더불어 가장 역사 적인 장소다. 일본 강제 통치하에 흩어진 조선불교의 중흥을 위한 대각교 운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용성스님 나이 47세 되던 해 스님은 산중 수행을 잠시 접어두고 속세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통한 중생구제에 나서기로 작정한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민족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구제이고, 먼저 불교의 대중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님은 1911년 홀연 상경하여 우선 신도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고,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가려했다. 그 해 4월 스님이 종로구 봉익동(鳳翼洞)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개창하면서 본격적으로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스님이 주창한 대각교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것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심화되어 가는 불교의 왜색화를 막고자함이 그 첫째 목표이고, 또한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각교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대중불교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소이자 수행장이었다. 한용운 스님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선생과 상의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스님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1919년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동참한다. 당시 천도교의 최린·기독교의 이승훈 등과 함께 3·1운동을 앞장서 추진하던 한용운 스님은 2월 25일경 선생을 대각사로 찾아왔다. 한용운 스님은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분연히 일어서 독립운동을 하려 한다고 말하니, 용성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기를 투합한다. 평소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중생구제의 일환으로 여겨오던 용성스님은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스님은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천도교·기독교 등 다른 종교계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스님과 민족대표들은 일경에 체포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 조사를 받는다. 스님은 일본인 판사가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이 취지에 찬성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떳떳하게 대답하였다. 또 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스님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 마음으로 좋아서 찬성하였다”고 하였다. 서슬퍼런 일경의 심문 앞에서도 조선독립에 대한 의지를 호국불교의 신념으로 표출하였다. 스님은 일제에 의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만해 한용운 스님과 민족 운동

만해 한용운 스님의 삶은 한마디로 불교의 유신과 민족 독립을 위한 구도의 역정이었다. 어려서 동학혁명에 가담하였고, 만주에서 광복운동에 참가하기도 한다. 또한 승려로서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한용운 스님은 민중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유심’지를 운영하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 린으로부터 계획을 듣는다. 또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스님은 즉시 대각사 주석하며 불교 개혁과 조국의 독립을 발원하던 용성스님에게 거사계획을 알린다. 불교계 적극적인 참여를 권유하여 용성스님과 나린이 민족 대표 33인에 서명한다. 한용운 스님은 육당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하자, 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더불어 공약삼장을 추가하여 조선 독립의 결의와 정당성을 더 강하게 표현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한용운 스님은 33인을 대표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과 의지’를 만방에 표한다. 일경에 체포된 이후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신간회(新幹會)운동과 조선불교청년동맹을 통한 불교청년운동을 강에 앞장선다.

전국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중앙학림(현 동국대) 청년불자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의 참가로 불을 지핀 독립운동은 불교계 청년들에게 이어진다. 불교계 종립학교였던 중앙학림(현 동국대) 학생들은 한용운 스님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불교계에 배포하는 일을 담당한다. 이를 기점으로 학생들은 항일투쟁에 직, 간접 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된다. 1918년부터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의 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한용운 스님은 는 1919년 2월 28일 10,000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수받는다. 그날 밤. 평소 자신을 따르던 중앙학림 학생들을 자신의 계동 집에 모이게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김봉신을 비롯하여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법린, 박민오 등 이었다. 이들 10명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1일 오후 2시 이후에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다. 한용운스님은 학생들에게 “서산(西山)과 사명(泗溟) 양 대사의 법손임을 굳게 명심하여 불교 청년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우리 불도가 다른 교도들의 앞장을 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비장한 격려를 하였다. 만해 스님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중앙학림 학생들은 사태가 시급함을 느끼고, 인사동에 있던 범어사 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긴급회의를 하여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협의한다. 학생들은 가장 연장자인 신상완을 총참모로 추대하였고, 백성욱과 박민오는 참모로 중앙에 남아서 연락책을 겸하여 진두지휘를 하게 하였다. 나머지 학생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3·1운동의 전개는 이들 중앙학림 학생들에 의해서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동래 범어사를 책임지고, 오택언은 양산 통도사를, 김봉신은 합천 해인사를, 김대용은 대구 동화사를, 정병헌은 화엄사를 중심으로 전라도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서울 시내를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 새벽 3시에 각각 회의장을 떠나 시내 포교당과 서울 근교의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지방을 담당한 학생들은 3월 1일에 있은 서울 시내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제각기 지방 사찰로 향하여 지역별 만세시위운동을 지도한다. 이로 인해 중앙학림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강제폐교까지 당한다. 불교의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과 불교 혁신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 독립선언서를 가슴속 깊이 품고 전국의 사찰로 떠나던 불교 청년들은 이후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해방이후 한국불교와 동국대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다.

취재,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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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2. 3. 6. 14:22

편집위원이가다-부산. 경남 통신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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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이 가다

부산. 경남 통신원 편

불지종찰 통도사


지난해 11월 ‘총지종보’ 전국 통신원 워크숍에서 토의 결정한 ‘편집위원이 가다’ 부산. 경남 편을 2월 8일 양산 통도사 일원에서 취재했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동장군이 기승을 부렸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명했다. 부산. 경남 지역 통신원들과 멀리 서울에서 지역 통신원들과 함께하고자 4분의 편집위원과 경북 영천 단음사 권순복 통신원도 참석하여 한바탕 취재 경쟁을 펼쳤다.

오전 12시 통도사 산문 앞에 모인 통신원들은 먼저 점심식사와 간단한 회포를 풀었다. 서울워크숍 이후 2달 만에 만난 통신원들은 그간의 안부를 묻고, 종보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현재 게재중인 진언행자 생활 광고에 대한 수주 방법과 지역 기사 전달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지역에서 가능한 광고와 기사들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날 점심공양은 부산. 경남 신정회 신인록 회장님께서 준비해 주셨다. 에너지를 가득 충전 한 후 본격 적인 취재를 위해 통도산 산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년의 노송, 위원들을 반기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 하지만 동장군의 기세는 만만치 않은 겨울 바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위원들은 통도사 산문을 통해 일주문 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산문을 들어서자 고찰로 인도하는 송림길이 우리를 맞았다. 그야말로 명품길이다. 통도천을 따라 일주문까지 약 1.6KM 정도 이어진다. 길의 좌, 우로 홍송(혹은 적송)이라 불리는 수백 년 된 소나무는 춤을 추듯 오솔길을 감싼다. 사람들은 이 길을 무풍한송(無風寒松)길이라 부른다. 편집위원들은 그동안 자주 참배하지는 못하지만 통도사를 들를 때마다 차를 타고 일주문 근처 주차장에 내린 기억들이 많다. 그만 놓쳐 버렸던 것이다. 문명의 편리함에 천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수많은 불자들과 과객들이 그러했듯이 소나무의 군무를 바라보며 부처님 전으로 다가간다. 위원들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주인공이 되어 솔밭 길을 걸어갔다.

한국 최대의 성보 박물관

아름다움에 취해 걷다보니 어느덧 부도원에 다다른다. 통도사 산내에 여기 저기 산재해 있던 고승들의 부도와 비석들을 1993년 가람 정비 사업을 통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승탑이라고도 불리는 고승 부도 60여기와 탑비, 공덕비, 중수비 등 60여기가 한자리에 있다. 부도원 앞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석당간이 하늘을 향해 서있다. 대부분의 당간은 지주 역활을 하는 석축과 청동으로 만든 당간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곳 당간은 구성체 모두가 화강암으로 만든 특이한 형태로 양산시 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돼있다. 당간의 중앙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음각으로 새겨져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우리나라 최대의 성보 박물관인 통도사 성보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한국최초의 불교전문 박물관으로 성보문화재 약 3만 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찰 부설 성보박물관이 유물 전시관의 기능만을 하는 반면 이곳은 학예 연구와 교육 문화기능을 모두 갖춘 박물관이다. 이박물관의 가장 큰 장점은 한국 최초로 불교회화실을 개설하고, 높이 10미터 이상의 대형 괘불을 상시 전시한다는 점이다. 위원들이 박물관을 찾았을 때는 청주 보살사 괘불을 전시 중이었다. 높이 6미터의 이괘불은 화기를 통해 조선 인조 27년 서기 1649년 제작되었다. 모시에 배접하여 석가모니 영산회상도를 그렸다. 결가부좌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교화성중, 대신, 사천왕 등을 생동감있게 표현했다. 1997년 문화재청은 보물 제1258호로 지정했다. 일층 전시실은 통도사 역사 유물관이다. 통도사는 신라 자장율사가 646년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 가사, 대장경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창건한 사찰이다. 통도사라는 이름은 승려가 되고자하는 출가자들이 모두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고 득도하거나, 법을 깨달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뜻과 통도산를 둘러싼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의 모습과 통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전시실은 통도사의 역사와 전래 유물을 전시하여 관람자들에게 통도사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이 박불관의 자랑인 불교회화실이 나온다. 통도사 각 전각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봉안되어 오던 불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불화의 밑그림인 초본을 비롯하여 소형 사경 변상도와 초대형 괘불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불화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기증 유물실에는 부산에서 내과의로 40년간 의술을 펄친 월저 김진조 박사가 기증한 한국화, 도자기 등 수집품들을 전시한다. 박물관을 나온 위원들은 원정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원정대성사의 유물도 체계적인 관리와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서원했다.

항아리의 비밀을 찾아라.


통도사는 통도천을 끼고 구릉지에 형성된 특이한 지형이다. 자장율사가 창건할 당시 신라의 가람배치는 정방형의 너른 들에 남북으로 전각을 배치하는 형태가 전형적인 법식이었다. 그러나 통도사는 냇물을 따라 동서로 길게 배치된 자유로운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상로전과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중로전, 영산전을 중심으로 한 하로전으로 구분되어진다. 현재 경내에는 12개의 큰 법당과 영축산내 20개의 암자를 포함해 전각의 수는 80여동에 이른다. 통도사 전각을 유심히 살펴보다보면 건물 지붕아래 평방위에 작은 항아리들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위원들은 이항아리가 무엇인지? 무엇을 담아두었을까? 왜 올려 두었을까? 궁금했다. 모두들 그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 다녔다. 항아리의 비밀은 소금 단지였다. 화재를 예방하기위해 소금을 올려 두었다 한다. 소금과 화재 예방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취재 결과는 소금은 거대한 바닷물을 상징한다. 바닷물의 거대함 위력으로 화재를 막으려는 의도로 단지를 올려 두었던 것이다. 불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화재 예방을 위한 방편으로 바닷물이나 소금을 항아리에 담아 묻는 풍습이 있었다. 해인사의 경우에는 절과 마주보는 매화산 남산 제일봉 꼭대기에 소금단지를 묻고 화마의 기운을 누른다. 소금은 그 특성과 색깔에 주술적인 힘을 부여하여 민간신앙에서 자주 등장한다. 소금이 음식의 부패와 변질을 막듯이 민간에서는 제액, 정화, 축귀용으로 소금을 사용한다.

자장율사와 금강계단

통도사는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삼보사찰 중의 하나다. 삼보는 불, 법, 승을 의미한다. 통도사는 그 중 불보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있다. 자장율사는 신라의 진골 출신으로 속명은 김선종랑이다. 세상의 번거로움이 싫어 깊은 산에서 수행하였다. 선덕여왕 5년에 제자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불법을 배우러 떠난다. 이곳에서 자장율사는 청량산 문수보살상에 기도하고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 불두골 한조각과 함께 사구게를 받는다. 스님은 신라로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고, 황룡사 9층 대탑을 조성하고 제2대 주지에 취임한다. 통도사에 진신사리를 봉안, 금강계단을 조성하여 승려들의 비구계를 내리는 성역으로 조성한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단일계단으로 비구계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전수한다. 위원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 두 손 모아 참배하고, 총지종 교세발전을 서원했다. 대웅전은 두 개의 건물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지어진 특이한 형태다. 동서남북으로 4면 현판의 이름을 달리한다.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 남쪽은 금강계단 ,북쪽은 적멸보궁이란 이름으로 편액을 걸었다. 모두가 부처님이 머무시는 곳을 표현한 것으로 조선 중기 불교 건축의 특수한 형태로 주목 받고 있다. 위원들은 남쪽의 금강계단 현판아래에서 기념 촬영을 한 후 경내 취재를 마쳤다.

서운암 된장 이야기


통도사는 20개의 산내 암자를 가지고 있다. 암자마다 나름대로 특별한 향기를 품고 있다. 위원들은 서운암을 참배하기로 하고, 차량에 올랐다. 서운암은 해매다 봄이면 들꽃축제로 유명하다. 서운암 너른 들에 가득 피어난 들꽃들의 향기는 겨울이라 찾을 수 없었다. 위원들을 맞은 것은 나란히 줄지어 늘어선 항아리였다. 서운암은 성파스님의 원력이 아니면 오늘의 모습을 갖출 수 없었다. 성파스님은 서운암을 중창하고, 85년부터 5년간 도자 3,000불을 조성 봉안했다. 십육만도자대장경의 대불사를 1991년 6월에 시작하여 2000년 9월 완성하였다. 사라졌던 전통 쪽 염색을 재현하고, 3년간의 연구 끝에 약 된장과 간장을 개발 사바의 대중들에게 보급했다. 지금은 서운암 주변 야산 20 만평에 100여종의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하여 봄, 여름, 가을 다양한 야생화를 감상할 수 있는 생태공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서운암에서 바라본 영축산의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이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은 알프스 웅장함을 앞에서 보는 것과 같았다. 봄이 오면 전국의 위원님들과 야생화 축제 현장에 함께 하기를 서원하면 아쉬운 취재를 마쳤다.

취재= 통도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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