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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1. 11. 9. 13:11

모든 생명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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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가 되기를


- 제14차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 한국대회 봉행

제14차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 한국대회가 11월 1일부터 11월3일까지 양양 낙산사 일원에서 봉행됐다. 1995년 시작된 이 대회는 올해로 14회를 맞으며 해마다 3국을 돌아가며 개최하고 있다. 한국 대표로는 종단협의회 회장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한 승, 재가 180여명이 참가했다. 불교 총지종에서는 인선 총무부장, 법경 밀교연구원 연구원,원당 밀인사 주교, 법일 벽룡사 주교, 서령 혜정사 주교, 사회부 김태원 교무가 참가했다. 중국 측은 첸잉 중국불교협회 회장스님 외 132명이, 일본 측은 이또 유이신 일,중,한불교교류협의회 회장 스님외 146명이 참석하여 전년도 대회보다 2배 이상 참석자가 늘었다.

11월 1일 저녁7시 양양 솔비치 리조트 컨벤션 센타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는 한중일 임원진과 참가자들 그리고, 최광식 문화부 장관을 대신해 모철민 제1차관과 정상철 양양군수가 참석해 대회를 축하했다. 불교종단협의회 부회장이자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보선스님은 환영사를 통해 “이번 모임을 속 깊은 소통의 자리로 삼아 삼국의 불교대표자가 하나된 목소리로 인류 화합과 평화의 발원을 서원하고, 유대관계를 보다 공고히 해 나갈 것을 염원하는 바입니다.”며 대회에 참가한 중국, 일본 대표들을 환영했다. 이에대한 답사로 일본측 야스다 에이잉 스님(일중한 불교교류협의회 부이사장)은 “일본은 지난 3월 11일 일어난 대재난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때 한국과 중국 여러분들께서 따뜻한 추고의 공양을 나누어 주심에 먼저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중국의 수당시대, 한국의 백제-신라시대, 일본의 나라사대는 불교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휼륭한 불교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정신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 합니다.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부해 질수록 거기에 걸맞는 높은 정신성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며 따뜻한 환영과 삼국의 불교 문화 교류에 더욱더 매진할 것을 제안했다.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축사는 모철민 제1 차관이 대독 하였고, 정상철 양양군수의 축사를 끝으로 첫날 환영 만찬을 마쳤다.

둘째 날에는 양양 낙산사에서 종단협 상임이사 혜경스님의 사회와 혜만스님의 집전으로 세계평화기원대법회를 봉행했다. 낙산사 주지 우송스님은 환영사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관음성지 낙산사에서 동북아 불교를 대표하는 대덕스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극한 정성으로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대법회를 봉행하는 것은 참으로 뜻 깊고, 봉축할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며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참가자들을 환영했다. 이어 3국의 예불의식과 평화기원 메시지 봉독에서, 각국의 전몽적인 예불의식이 봉행되었다. 공동발원문은 3국 대표인 한국의 무원 스님(종단협 부회장 직무대행), 중국의 민셩스님(중국불교협회 부회장), 일본의 모짜다 니찌유스님(교류협의회 상임이사)의 공동 낭독으로 발원했다. 각국 발원문에는 강원 평창 동계올림픽 원만 개최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게 되기를 기원과 세존의 불살생 정신을 이어받아 대립과 폭력을 멈추게 하며 모든 생명이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 했다. 오후에는 솔비치 컨벤션 센타에서 한중일국제학술강연회가 개최되었다. 기조연설에는 진각종 혜정 정사와 중국의 쉐청스님, 일본의 교류협회회장 이또오 유이신스님이 하였다. 이어 각국대표의 주제발표와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저녁 7시 환송 만찬을 끝으로 2박 3일간의 공식일정을 마쳤다. 양양=김종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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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1. 11. 9. 13:02

총기40년 추계 승단총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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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40년 추계 승단총회 개최

-통일음악예술제 전 종단의 힘을 결집, 새로운 도약으로 이어지기를 결의

총기40년 불교총지종 승단 총회가 10월 19일 설악 대명콘도 동백홀에서 봉행되었다. 효강종령 예하를 모시고 지성 통리원장의 집공으로 열린 이날 총회에는 전국의 스승님 전원이 참석했다. 효강종령예하는 법어를 통해 “그간 논의가 되었던 서원당 불상 봉안 문제는 원점으로 되돌려 기존의 본존과 양계 만다라 봉안을 기본으로 전국의 서원당을 통일합시다. 또한 그간 종단의 기관별 역할이 유명무실 하였으나, 오늘 총회를 기점으로 각 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합시다. 종조님이 남기신 가르침을 철저히 따라, 화합으로 종단 발전을 이루도록 합시다.”고 유시하셨다. 이어 지성 통리원장의 종단 현안 사업보고를 통해 10월29일 열리는 ‘총기40년 통일음아예술제’ 진행성과와 행사진행에 관한 보고가 있었다. 전국의 스승님들과 교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당부했다. 그리고 현재 운영 중인 기로원 활용 방안, 괴산수련원 불사, 실지사 건물 매입의 건, 정심사 부지활용의 건, 만다라 관련 사항, 종단협의회 현안, 벽룡사 이전과 구 사원 부지 생활시설 신축관련 보고(수익사업), 강공경비보고 및 토의가 이어졌다. 또한 강공에 대한 설문조사도 실시했다. 강원 고성=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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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1. 11. 9. 13:00

불교총지종 제78회 추계강공회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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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 제78회 추계강공회 봉행


-외부강사 초청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

불교총지종 제78회 추계강공회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강원도 고성 설악대명콘도 동백홀에서 봉행되었다. 효강 종령예하를 비롯한 지성 통리원장, 대원 중앙종회의장, 법상인 사감원장 등 집행부와 전국의 스승님 64명이 동참 했다. 18일 오후 3시 개강불사에서 지성통리원장은 개회사를 통해“전국의 스승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계강공회를 개최하게 되어 기쁩니다. 강공을 통해 부처님의 제자로서 마음가짐을 다시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고 말하였다. 이어 효강 종령 예하의 개강불사 법어에서 “가을 설악의 아름다움은 법계의 만다라가 펼쳐진 것입니다. 새해불공 때 세운 서원이 잘 이루어 졌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하는 시간이 되고, 종조님의 유훈을 받들어 교상과 사상을 바로 하는 강공이 되기를 바랍니다.”며 당부하였다. 이어 종령님의 특별정신교육이 있었다.(효강 종령 특별정신교육 5면)

강공 첫째날 외부 강사로는 강경중 전 동해중학교 교장으로부터 ‘동서양의 종교’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둘째 날에는 동방대학원대학교 자연치유학과 고광환 교수가 ‘삼밀수행과 자연치유’에 관해 강연을 펼쳤다.

셋째날 오전에는 중앙교육원장 화령정사의 ‘신묘장구대다라니 해석’에 관한 교육이 있었다. 이어 종강불사를 끝으로 2박 3일간의 추계강공을 마치고 스승님들은 전국의 교화 현장으로 돌아갔다. 강원 고성=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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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1. 11. 9. 12:10

불교 총지종 40년, 화합과 도약의 화음으로 천상을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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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KBS홀 2,000여 불자들로 가득차 성황

불교 총지종 40년 통일음악예술제가 10월 29일 여의도 KBS홀에서 2,000여명의 국내외 불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봉행됐다. 이날 예술제에는 이른 아침부터 전국에서 동참을 바라는 불자들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1부 통일의 노래에서는 메디치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피가로의 결혼’등 축하곡으로 서막을 열고 소프라노 권성순의 가곡과 선화예중 최유정 양의 찬불동요로 축제의 막을 열었다. 이어 법경 정사(밀교연구원 연구원)의 사회와 통리원 총무부장 인선정사의 집공으로 열린 개회법회에서 효강 종령은 영상 법어를 통해“ 오늘 이 예술제가 음악을 통해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만다라가 되어 부처님의 진리로 하나되는 통일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며 우주 삼라만상이 소통과 화합 속에 살아갈 때 전체가 하나 됨을 강조했다. 이어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이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 불교 총지종이 화합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며 영상 축하메세지를 전했다. 통리원장 지성정사는 개회사에서 “반목과 대립이 아닌 소통과 화합으로 모두가 하나 되는 불국토를 이루는 첫 걸음이 되기를 서원합니다. 또한 ‘통일음악예술제’가 우리 사회의 소통과 화합을 이루고 세대, 계층, 지역 간의 통일뿐만이 아니라 남북의 통일, 더 나아가 세계 평화 통일을 이루는 법향과 법음이 되기를 서원합니다.”며 이번 예술제의 개막을 선언했다. 많은 승가, 재가 귀빈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서는 승가를 대표하여 종단협의회 사무총장 관음종 홍파스님이 “원정 대성사의 밀교중흥의 대원력을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했습니다. 총지종의 소통과 화합의 대원행이 혼란스러운 이시대의 새로운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재가를 대표해서 김충환 국회의원(한나라당, 서울 강동 갑)은 “오늘 이 자리에서 불교 총지종이 단합된 모습으로 소통과 화합의 예술제 개최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불교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부대중에게 부처님의 법음이 전해지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며 축사를 했다. 이어 총지종 통리원장 지성정사는 김포 마하 이주 센타, 오산 다문화 가족 지원센타 ,줌마인 연대 등 3곳의 이주 노동자 및 다문화 지원센타와 새터민 경기대학교 조리학과 1학년 임성군에게 격려금을 전달하고, 이날 행사의의미를 더했다. 회향서원을 끝으로 개회법회를 마쳤다.

제2부 통일음악예술제의 본무대는‘원정 대성사의 일대기 및 소리로 하나된 총지인의 노래’를 주제로 김자영 전 KBS아나운서의 사회로 막을 올렸다. 제1막은 대구 금강 합창단(지휘 배해근, 반주 송미희)의 무대로 원정대성사의‘탄생과 불교입문’을 테마로 ‘지옥과 극락은’,‘배 뛰워라’ 두곡을 연주해 총지종 합창의 서곡을 열어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제2막은 원정 대성사의 ‘수행과 창종’을 주제로 부산 만다라합창단의 ‘옴마니반메훔’, ‘타임 투 세이 굳바이’ 두곡을 무대에 올렸다.만다라 합창단은 객석의 관객들을 하나로 집중시켜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이어 제3막은 원정 대성사의‘대원의 수립과 열반’을 주제로 서울 마니합칭단의 무대로 ‘내가 그대 이름을 부를 때’와‘님이 오신날’로 원정 대성사의 구도 역정을 마무리 했다. 제4막은 ‘총지인의 노래’을 테마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전세계가 놀라는 경이로운 경제 성장의 이면 속에 자리 잡은 계층 간의 갈등, 남북의 분단을 극복하고 화합과 통일로 나가는 메시지를 총지종 전국 연합 합창단이 ‘기도’, ‘석불의 빈손’과 ‘총지인의노래’로 동참 불자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최고의 장면을 연출 하였다. 이 순간은 총지종 교도뿐만이 아니라 동참한 불자라면 누구나 천상의 가릉빈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약1시간에 걸친 아름다운 합창의 하모니를 아쉬움으로 마무리하고, 이어진 3부 특별공연에서 최소리의 아리랑파티와 추가열, 주현미, 안치환의 무대가 이어져 동참한 불자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이날 행사는 약 4시간 가까이 이어졌으며, 전국에서 동참한 불자들로 좌석이 매진되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동참자들은 복도와 외부 로비에서 티브 화면으로 중계되는 공연 모습을 보고 아쉬움을 달랬다. 불교 총지종은 이번 예술제를 계기로 제2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화합과 통일의 시대적 소명을 다할 것이다.

여의도 KBS홀=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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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1. 10. 11. 17:18

“내가 조선의 국모다” 낭인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인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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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선의 국모다” 낭인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인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 낭인의 칼 앞에서도 당당했던 여인 명성황후

한 달 만에 다시모인 편집위원들은 지난 강화도 취재에서 확인한 흥선대원군과 병인양요에 이어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를 풀어보기 위해 황후의 생가가 있는 여주로 출발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여 준 두 사람. 두 사람의 일생은 꺼져가는 조선 왕실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때마침 여주 일대는 도자기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광주,여주,이천은 조선시대 관요가 자리한 곳으로 지금까지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신륵사의 통일신라시대 다층전탑 앞에서 바라본 남한강의 아쉬운 모습도 이번 취재에 담았다.

국모의 고향 여주

여주는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경기도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남한강이 남동쪽에서 북서로 관통한다. 남한강은 예로부터 수상운송에 유리하여 여주를 미곡 집산지로 발전시켰다. 세종대왕릉과 고달사지, 신륵사 등 유서 깊은 사적과 문화재가 산재해있다. 여주읍 능현리에 위치한 명성황후의 생가는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아있었다. 1995년부터 복원 작업에 착수하여 2008년 일대를 사적지로 완성했다. 생가는 황후가 8세까지 살았던 곳으로 이후 한양으로 옮겨 왕비로 간택되기 전까지 살던 감고당도 이전 복원하였다. 명성황후 기념관도 함께 건립되어 파란 만장 했던 왕후의 일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생가 주변은 조선시대 민가도 함께 복원되어, 당시 서민들의 시대상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황후의 탄생

명성황후의 집안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황후의 아버지 여흥 민씨 유중의 자손 이다. 아버지 민치록은 6대조 민유중의 묘소를 관리하며 여주에서 생활하였다. 철종조 1851년 음력 9월 25일 부인 한산이씨와의 사이에서 황후의 운명을 가진 딸 자영을 낳는다. 그러나 아버지 민치록은 황후가 8살 되던 해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후 서울로 이사한 황후는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양가의 규수로 착실히 성장해 나간다. 당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대원군은 안동 김씨 등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정치적 영항력이 적은 양가의 규수를 찾고 있었다. 대원군의 부인의 추천으로 대원군의 눈에 띄어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황후로 책봉되어 대궐로 들어온 어린 민자영은 궁궐안의 여러 서적을 탐독하며 전통과 현대의 다양한 식견을 갖춘 황후로 성장한다. 어려운 가세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왕비로 책봉되었지만 황후의 삶은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원자와 공주를 출산하였지만 바로 잃는 슬픔을 이겨내야 했고, 시아버지 대원군의 실정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고종 황제의 내조도 황후의 몫이었다.

국모의 역할 그리고 낭인의 칼

총명함으로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황후는 마침내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된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의 문물개방은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백성들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한다. 반면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높아만 간다. 1882년 결국 신식군대인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한 구식군대 무위영의 군사들이 난을 일으킨다. 민씨 일족과 황후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원군은 다시 등장하고, 황후는 변장을 한 채 피신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다시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나라 텐진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써 속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온다. 청나라의 개입은 대원군을 청나라로 호송을 하였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시기 황후는 보다 많은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황후는 조.일 수호통상, 신사유람단 일본파견, 청나라 영선사 파견,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이름을 하사하는 등 조선의 발전을 위해 많은 외교적 업적을 남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개혁을 구실로 조선의 왕권과 국권을 침탈하기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시도한다. 이에 황후는 ‘以夷制夷(이이제이)’ 적으로 적을 친다는 뛰어난 국방 외교전술을 강구한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뛰어난 외교력으로 러시아, 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 "삼국간섭"을 성사시킨다. 당황한 일본은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엄청난 만행을 계획한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실행한다. 황후는 일본의 자객 다카하시겐지의 칼에 의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본은 명성황후를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 대원군과 사사건건 정쟁을 일으키는 부정적 이미지로 조작한다. 그러나 황후는 죽음 앞에서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의연한 국모였다. 우리 모두가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야 할 부분이다.

남한강의 수호사찰 신륵사

신륵사는 명성황후 생가로부터 자동차로 약 10여분 떨어진 봉미산아래 남한강변에 위치한 고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 1376년(우왕 2)에 나옹 혜근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세종대왕릉) 원찰로 삼아 보은사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고려 고종 때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났는데, 이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이 사나워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남한강가의 수해를 부처님의 원력으로 막았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신륵사는 많은 불교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바로 강가 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다. 고려시대 건립된 이탑으로 인해 신륵사는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상의 부도탑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또한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이외에도지금은 해체 수리중인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다. 신륵사의 또 다른 자랑은 바로 남한가의 수려한 풍광을 내려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방송사의 애국가 배경화면으로 쓰이기도 했던 정자는 보수 공사를 해 올라가 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편집위원들이 다층전탑 앞에서 바라본 남한강의 풍경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굽이쳐 흐르던 강은 4대강 여주보 사업으로 많은 변화를 보였다. 건너편 강변은 미사리 조정 경기장을 옮겨 놓은 듯 차가운 콘크리트로 벽으로 덮어두었고, 상류 쪽 모래톱은 거의 사라져가는 모습이었다. 아쉬움에 한참을 처다보았지만, 이미 인간의 손에 사라져버린 자연은 돌이킬수 없었다. 예전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굿굿이 자리를 지키는 부처님은 아직 계시니 그걸로 위로를 삼으며발길을 돌렸다.

지금 여주는 축제 중이다. 경기도가 추최하는 세계도자비엔날레와 여주진상품 축제가 열리고 있다. 편집위원들은 겉으로 화려한 축제보다는 여주가 가진 역사적 흔적을 찾아보는 것을 권했다. 국모의 고향이자, 신륵사의 고장 그리고 사라져가는 남한강을 우리 교도들이 찾아 보기를 권했다.

취재= 편집위원 이인성,박묘정,최영아 통신원 벽룡사 양재범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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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1. 10. 11. 17:13

천태종 제2대 종정 대충 대종사 18주기 열반대재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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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 제2대 종정 대충 대종사 18주기 열반대재 봉행

천태종 제2대 종정을 역임한 대충대종사 18주기 열반대재가 9월 29일 단양 구인사 광명전에서 봉행되었다. 천태종 도용 종정등 총무원 관계자와 사부대중 1,000여명이 참석했다.

종의회의장 도산 스님은 이날 추모사를 통해 “오늘날 종단의 조직 체계화, 전국 사찰 창건, 성역화 불사, 국청사 한ㆍ중 조사기념당 건립, 전국 불법홍포, 단월(檀越)의 급성장, 국제불교교류 등에 이르기까지 이루 나열할 수 없는 불연의 업을 쌓으시되, 이 모두를 회향해 주신 공덕 또한 우리 사부대중 모두가 누리고 있다”며 대충대종사의 업적을 기렸다.

대충대종사는 1945년 구인사에서 천태종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를 은사로 출가, 1974년 제2대 종정에 취임해 상월대조사 열반 당시 70만 명이었던 천태종을 신도 200만 명의 종단으로 급성장시켰다. 이밖에 구인사 성역화 불사를 펼쳐 현재 모습의 초석을 다졌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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