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최근 공영방송 KBS에서는 1,2TV를 통해 『한국의 유산-운암 김성숙』이 방영되고 있다. 정식 다규멘타리는 아니지만 프로그램 막간 팝업으로 인기가 높은 코너이다.
몇 장의 사진과 간단한 코멘트가 전부지만 운암 김성숙은 승려 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임을 확실히 전해준다.
스님이자, 항일투쟁가, 사상가, 저술인, 대학교수 등 파란만장한 태허(太虛)스님의 일생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봉선사서 수학하다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해방 후에는 반이승만 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재야운동에 참여했다. 말년에 가난과 병고와 싸우다가 쓸쓸하게 입적하면서도 그가 했던 말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였다. 어쩌면 평생을 은산철벽을 무너뜨려 도를 이루듯이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곧은 한길을 간 것은 아닌가?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무작정 가출 그러나 부처님 법연이 먼저였다.
태허스님은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성숙(星巖), 아호는 운암, 성숙은 법명이다. 자식이 없어 고심하던 그의 어머니는 미륵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스님을 얻었다. 어린 스님은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글방에 나가 한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전국 곳곳에 독립학교가 설립됐다. 스님의 고향 철산에도 대한독립학교가 세워진다. 10살 때 입학한 스님은 그곳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등 외부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 하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학교는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섰다. 태허스님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그 무렵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낸 백부가 스님의 집을 찾아왔다. 백부는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백부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어린 스님은 자신도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간〉에 실린 스님의 회고는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스님은 만주로 향했다. 중국어를 몰랐던 그는 중국어를 안 쓰고 만주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건너가는 길을 택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 붙잡혀 여관에 붙들려 있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님은 출가한다.
그가 원산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부처님오신 날이었다. 원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강사로 구경을 가고, 시내가 텅 빌 정도였다. 스님도 여관주인을 따라 서강사로 갔다. 다음날 새벽 산책하던 중 그는 스님을 한명 만났다. 여관주인에게 벗어날 심산으로 스님에게 말을 물었다.
“여보시오, 스님.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출가하려 하느냐?”
“경전을 연구하려고요.”
스님은 자신을 양평 용문사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을 따라가면 출가할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그길로 용문사로 가서 출가 하고, 그곳에서 2년 6개월 정도 수학했다.
“그런데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커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초보 중노릇을 하는 모든 방법을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스님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스님(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은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22년 4월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스님(1879~1944)도 만나게 된다.
스님의 회상이다.
“노스님은 손병희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스님은 손 영감이 오면 나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졌다. 만해스님과 김법린(1899~1964)도 자주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때 이름이 널리 나 있었다.”
봉선사에 머물면서 손병희, 만해스님, 김법린 등과의 인연으로 스님도 3.1운동에 가담한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선지 5년만의 일이다. 그는 봉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사상이 퍼져있었다. 만주, 상해,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해 비밀리에 사회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스님도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 가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김규하.김봉환.김정완.윤종묵.차응준스님 등 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북경에 도착한 그는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장건상(張建相. 1882~1974), 양명(梁明), 장지락(張志樂. 1905~1938)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던 그는 1926년 광동으로 가 ‘광동코뮨’에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또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임정을 떠났다.
좌우의 이념보다 민족의 해방이 우선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에 뒀던 스님,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되는 날까지 숨 가쁘게 투쟁해왔던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 좌익인물이라는 낙인, 그리고 박해’였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혁신당의 리더로 활약해,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나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석방될 수 있었다. 이 때 부터 그를 도와주던 손길도 끊어졌다. 정권의 눈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 때 운허(耘虛)스님(1892~1980)은 가끔 쌀을 보내 스님의 생계를 도왔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태허스님.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그가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받쳤다. 정부는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태허스님은 만해스님. 김법린과 마찬가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는 이가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공양한 태허스님이 제대로 추모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자료제공= 운허 김성숙 기념 사업회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