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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4:22

불교 총지종 괴산 수련원 중원사 착공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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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팔엽원 비로자나 부처님 중심에 진언밀법도량 건설

-불교 총지종 괴산 수련원 중원사 착공 불사

 

불교총지종의 오랜 숙원 사업인 괴산 수련원 건립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 389-11번지 일대, 가령산 자락 총지종 수련원 자리에 서원당과 숙소, 공양간 등이 들어선다.

411일 오후 2시 중원사 착공지진불사가 총지종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 정사, 대전 만보사 승원 정사, 중원사 정정심 전수, 청주 혜정사 진일심 전수, 광주 법황사 혜안정 전수 및 총지화, 사홍화 기로스승이 동참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만보사 승원 정사의 집공으로 총지종 의궤에 따라 진행된 지진불사에서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 정사는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괴산 수련원 서원당 건립을 염원하는 스승님과 교도 분들의 불공 공덕으로 오늘 역사적인 첫 삽을 뜨게 되었습니다. 총지종의 정통 밀교 진언 염송 수행의 성지가 되기를 서원합니다.”며 공사의 원만 성취를 서원했다. 이어 착공식에서 스승들은 첫 삽을 뜨며 모든 공사가 사고 없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비로자나 부처님께 서원했다.

총지종 금강성지(金剛聖地)인 괴산 수련원 중원사는 태백산맥에서 남동쪽으로 내달리는 소백산맥의 가운데 솟은 속리산지맥인 가령산자락에 위치했다. 지형 상으로 둥근 분지를 중심으로 팔방에 연꽃잎이 둘러싼 형태이며, 봉우리마다 수많은 전설이 묻혀있다. 특히 태장계 만다라의 중대팔엽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형상의 지세는 총지종 수행 도량 건립지로 최적의 명당이다.

괴산=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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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25

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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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졌던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 태허스님

 

최근 공영방송 KBS에서는 1,2TV를 통해 한국의 유산-운암 김성숙이 방영되고 있다. 정식 다규멘타리는 아니지만 프로그램 막간 팝업으로 인기가 높은 코너이다.

몇 장의 사진과 간단한 코멘트가 전부지만 운암 김성숙은 승려 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임을 확실히 전해준다.

스님이자, 항일투쟁가, 사상가, 저술인, 대학교수 등 파란만장한 태허(太虛)스님의 일생은 우리나라 독립투쟁의 역사와 맥을 함께 한다.

봉선사서 수학하다 손병희 선생과 만해스님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해방 후에는 반이승만 정권 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에 동참했다. 5.16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재야운동에 참여했다. 말년에 가난과 병고와 싸우다가 쓸쓸하게 입적하면서도 그가 했던 말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야였다. 어쩌면 평생을 은산철벽을 무너뜨려 도를 이루듯이 우리의 독립을 위해 곧은 한길을 간 것은 아닌가?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무작정 가출 그러나 부처님 법연이 먼저였다.

 

태허스님은 평안북도 철산(鐵山)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성숙(星巖), 아호는 운암, 성숙은 법명이다. 자식이 없어 고심하던 그의 어머니는 미륵부처님께 3년간 기도를 하고 스님을 얻었다. 어린 스님은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글방에 나가 한문을 배웠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 전국 곳곳에 독립학교가 설립됐다. 스님의 고향 철산에도 대한독립학교가 세워진다. 10살 때 입학한 스님은 그곳에서 을지문덕, 이순신 등 외부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인들에 대해 공부 하며 애국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학교는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섰다. 태허스님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직접 한문을 가르쳤다.

그 무렵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를 지낸 백부가 스님의 집을 찾아왔다. 백부는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백부로부터 독립군 얘기를 들으며 어린 스님은 자신도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간에 실린 스님의 회고는

 

독립군 얘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주 신흥학교로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왔다. 마침 집에서 땅을 판 돈이 있어 그 돈을 몰래 갖고 왔다. 집안 어른들께는 죄송했지만 독립을 위해 쓴다면 용서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온 스님은 만주로 향했다. 중국어를 몰랐던 그는 중국어를 안 쓰고 만주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가서 다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건너가는 길을 택했다. 원산에 도착한 그는 뜻하지 않게 일본군에 붙잡혀 여관에 붙들려 있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님은 출가한다.

그가 원산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부처님오신 날이었다. 원산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서강사로 구경을 가고, 시내가 텅 빌 정도였다. 스님도 여관주인을 따라 서강사로 갔다. 다음날 새벽 산책하던 중 그는 스님을 한명 만났다. 여관주인에게 벗어날 심산으로 스님에게 말을 물었다.

 

여보시오, 스님. 스님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출가하려 하느냐?”

경전을 연구하려고요.”

 

스님은 자신을 양평 용문사에서 왔다고 소개하며 자신을 따라가면 출가할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은 그길로 용문사로 가서 출가 하고, 그곳에서 26개월 정도 수학했다.

 

그런데 내가 한문을 아니까 경전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어. 흥미도 커지고, 그래서 2년 반쯤 초보 중노릇을 하는 모든 방법을 배웠지. 그러고 나니 나를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로 보내 경전을 정식으로 배우게 하더군.”

 

봉선사에서 3년 간 머물면서 스님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찰의 사무도 맡아 처리했다. 당시 봉선사 주지로 월초(月初) 거연(巨淵)스님(1858~1934)이 주석하고 있었다. 스님은 월초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2248일 성월(惺月) 일전(一全)스님을 계사로, 월초스님을 존증아사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 때 받은 법명 성숙은 평생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그곳에서 민족대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스님(1879~1944)도 만나게 된다.

 

스님의 회상이다.

 

노스님은 손병희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스님은 손 영감이 오면 나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졌다. 만해스님과 김법린(1899~1964)도 자주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때 이름이 널리 나 있었다.”

 

봉선사에 머물면서 손병희, 만해스님, 김법린 등과의 인연으로 스님도 3.1운동에 가담한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집을 나선지 5년만의 일이다. 그는 봉선사 몇몇 스님들과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사람을 모아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사상이 퍼져있었다. 만주, 상해,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던 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해 비밀리에 사회주의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스님도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에 가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3년 김규하.김봉환.김정완.윤종묵.차응준스님 등 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의 항일 투쟁

 

북경에 도착한 그는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장건상(張建相. 1882~1974), 양명(梁明), 장지락(張志樂. 1905~1938)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고 혁명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조선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테러운동을 지도하던 그는 1926년 광동으로 가 광동코뮨에 참가했다. ‘광동코뮨의 실패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36년 중국 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임정을 떠났다.

 

좌우의 이념보다 민족의 해방이 우선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에 뒀던 스님,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애썼다.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해방되는 날까지 숨 가쁘게 투쟁해왔던 그에게 해방된 조국이 준 선물은 미군정반대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 금고형, 좌익인물이라는 낙인, 그리고 박해였다.

19615.16 군사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혁신당의 리더로 활약해,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냈다. 그나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석방될 수 있었다. 이 때 부터 그를 도와주던 손길도 끊어졌다. 정권의 눈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 때 운허(耘虛)스님(1892~1980)은 가끔 쌀을 보내 스님의 생계를 도왔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태허스님. 되돌아온 것은 가난과 탄압이었지만,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그가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받쳤다. 정부는 그가 죽은 지 10여년 후인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태허스님은 만해스님. 김법린과 마찬가지로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모하는 이가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공양한 태허스님이 제대로 추모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자료제공= 운허 김성숙 기념 사업회

편집, 정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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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17

뷸교 총지종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총무부장 인선정사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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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총무부장 인선정사 선임

 

불교총지종 효강 종령 예하는 현재 공석중인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종헌, 종법에 의거하여 129일자로 현재 공석중인 통리원장 직무대행에 인선정사를 선임했다.

통리원장 직무대행 인선정사는 총기28년 항마급 대법사로 승직에 입직하여, 통리원 사무국장, 마산 운천사 주교, 사회부장, 총무부장 등 종단 주요 보직을 거쳤다.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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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8. 13:14

전국사원 상반기 49일 불공 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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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안녕과 자녀 잘되기 서원

 

불교총지종은 219일 전국 사원에서 총기 42년 상반기 49일 불공에 들어갔다.

서울 총지사(주교 법등정사) 서원당은 총기42년 전반기 49일 불공에 스승과 교도 모두가 진호국가불사와 자녀 잘되기 서원에 한 마음을 모았다. 총지사 주교 법등정사는 설법을 통해 전반기 49일 불공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녀 잘되기 불공을 병행해야 된다.며 원정 대성사께서 제정하신 총지종의 특별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총지종의 모든 스승과 교도가 일치단결하여 49일 동안 정진해야합니다. 또한 수행 기간 중에는 계율을 지키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정진에 방해가 되는 장소의 출입을 삼가하고 시간을 지킬 수 있도록 다 같이 서로를 경책하며 불공에 임합시다.”며 입제에 드는 교도들의 마음을 다잡았다. 49일간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와 자성(自省)의 시간을 되기 바란다.

<진호국가불사>의 진언은 움훔야호사이다. 이 진언불사 출처는 종조 원정 대종사가 밀교경전인 수호국계주다라니경에 근거했다. 의궤의 정립은 총기8(1979) 426일 춘계강공회에서 제정되었지만, 이미 1975년부터 진호국가불사의궤를 시행했었다. 내용은 나라발전, 국태민안, 조국평화통일을 기원한다. 이 호국 불사는 1년에 2회 상.하반기로 나누어 각각 49일 동안 행한다. 또한 총기20(1991)부터 종령 특별 유시로 자녀가 잘 되어 나라의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한 자손 불공이 시작되었다. 상반기 49일 불공은 48(양력)에 회향된다. 회향일의 의미는 부처님오신날이 음력 48일이지만, 종단은 이를 양력으로 정했으므로 8일에 마친다. 총지사=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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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7:36

제43회 동해중 졸업식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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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해인으로 21세기의 주역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총기42년 종립 동해중학교 졸업식이 26일 오전 1030분이 해오름관에서 봉행되었다.

졸업식에는 총지종 종립 관음학사 이사장 지성 정사, 법선 학교법인 사무국장, 변 혁 총동창회 사무총장 및 학부모 내빈 약 500여명이 참석하여 3년간의 중학교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졸업생들을 축하했다.

이날 졸업식은 예전의 방식과는 달리 졸업생들이 제작한 동영상 상영을 통해 3년간의 추억을 회상하였다. 특히 졸업생 전원이 단상에서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졸업장과 상장을 수여 받고, 이사장 지성 정사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장재계 교장 선생님은 회고사를 통해오늘 졸업하는 학생들은 제가 학교장으로 취임하던 해 본교에 입학한 학생들입니다. 올해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자랑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2012년 동래교육청 관내에서 성적 향상률이 보통이상에서 1, 기초미달 부분에서는 관내 2위를 달성하였으며, 이과 쪽으로는 부산과학고에 2명 부산일과학고에 3, 문과 쪽으로는 부산외고 1, 부일외고에 4, 그리고 해운대고 1, 북일고 1명이 합격했습니다. 특히 졸업생 전원이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고등학교에 전원 진학하였습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을 격려했다.

이어 이사장 지성정사는 축사를 통해 졸업은 끝남과 동시에 시작을 의미합니다. 즉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지금 세계는 국제화, 개방화의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온 세계를 무대로 하여 개인의 역량을 마음껏 펼치며, 지식, 정보화 시대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세대입니다. 이러한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역량과 자세를 기를 때입니다.”며 정보화 시대의 주역이 될 졸업생들의 앞날을 축하했다.

이날 졸업식에서는 영예의 이사장 상은 임민규군이 수상하였고, 3학년1반 이광선 외 3명이 불교총지종 장학금을 받았고, 21명의 졸업생에게 동창회 장학금 등이 수여되었다. 동해중학교는 19683월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제43회 졸업생 174명을 더해 총 졸업생 17,140명이 졸업한 전국 최고의 명문 종립학교이다. 부산 동해중=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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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종보 | Posted by 불교문화전문기자 김종열 2013. 4. 17. 17:31

한민족의 큰 명절 『설』 그 의미와 유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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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법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은 고유의 역법으로 명절을 지냈다.

 

설날의 의미

 

설날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본래 설날은 조상 숭배와 효()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대 조상과 자손이 함께 하는 아주 신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시 생활의 굴레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현대에 와서 설날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곧 도시 생활 오는 긴장감과 강박감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게 된 다. 설날은 세속의 시간에서 성스러운 시간으로 옮겨가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평소의 개인적인 세속 생활을 떠나서 조상과 함께 하며 정신적인 유대감을 굳힐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이 바로 설날인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서 국가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설날은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국민 대부분이 고향을 찾아 떠나고, 같은 날 아침 차례를 올리고, 또 설빔을 즐겨 입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같은 한 민족이라는 일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볼 때도 설날이 가지는 의미는 공동체의 결속을 강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한 명절 이상의 기능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설날의 어원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고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정도의 설이 있다.

먼저 설날을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에서 그 어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이라는 의미와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설날은 묵은해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해에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으로, 아직 완전히 새해에 통합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못한 그러한 단계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설날은 "선날" 즉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라는 말에서 '새해 새날이 시작되는 날'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선날"이 시간이 흐르면서 연음화(連音化)되어 설날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설날을 "삼가다[謹愼]"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그 어원을 찾기도 한다. 이는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이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간 질서에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생긴 말이다. 한편 설날은 원일(元日),원단(元旦),정조(正朝),세수(歲首),세초(歲初세시(歲時연두(年 頭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도 불린다.

 

 

 

설날의 유래

 

설날이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우선 역법(曆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설날의 유래는 역법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가 나름대로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음은 중국인들도 진작 인정하고 있었다.삼국지 (三國志)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신라 문무왕 대에는 중국에서 역술을 익혀와 조력(造曆)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단순한 중국 역법의 모방이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독자적인 명절이라 할 수 있는 가위[嘉俳]나 수릿날의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우리 민족이 고유한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중국 전래의 태양태음력이나 간지법(干支法) 이외에 우리 고유의 역법 제정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설날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양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설날의 유래를 추측해 볼 수 있다.수서(隨書)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회연하고, 이날 일월신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제사편에는 백제 고이왕 5(238) 정월에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냈으며, 책계왕 2(287) 정월에는 시조 동명왕 사당에 배알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정월 제사가 오늘날의 설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미 이때부터 정월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설날과의 유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제36대 혜공왕(765780) 때에 오묘(五廟:태종왕, 문무왕, 미추왕, 혜공왕의 조부와 부)를 제정하고 1년에 6회씩 성대하고도 깨끗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정월 2일과 정월 5일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설날의 풍속이 형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삼짇날·팔관회·한식·단오·추석·중구·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단오·추석을 4대 명절이라 하였으니, 고려시대에는 설이 오늘날과 같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명절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날의 민속놀이

 

 

고싸움놀이

 

전남 광산군 대조면 질석리 윳돌 마을에서 매해 음력 정월 10일경부터 2월 초하루에 걸쳐서 벌이던 놀이다.

큰 줄을 꼬아 앞쪽에 고를 짓고 이것을 양쪽에서 밀어서 부딪게 한 다음 상대방의 고를 땅에 내려뜨린 쪽이 이기게 된다. 이 놀이의 유래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윷돌 마을이 황소가 쭈그리고 앉은 와우상이라 터가 거세기 때문에 이를 풀어주기 위해 시작하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은 전남 일대의 큰 마을마다 퍼져있는 이야기이다. 고싸움놀이를 줄다리기 놀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먼저 어린아이들의 고싸움으로 시작하여 다음날에는 청소년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청년들의 고싸움으로 커가며 마을 간의 대항전을 벌인다.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되었다.

 

 

 

 

널뛰기

 

부녀자들의 대표적인 놀이로 전국에 고루 분포하며 음력 정초를 비롯해 단오 한가위 등 큰 명절에 행해진다.

마당에 짚이나 가마니로 널밥을 만들어 놓고 기다란 널판을 얹어놓고 두 사람이 널의 양편에 각각 올라서서 널을 뛰는 놀이 이다. 널뛰기의 유래에 대해서 다만 그 놀이의 형태나 성격으로 미루어 폐쇠적 여성관이 자리 잡기 전인 고려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의 여성윤리는 가능한 한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몸놀림을 억제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에서의 널뛰기는 비인간적 제약 아래에 있던 여성들에게 하나의 탈출구였다.

 

연날리기

 

연날리기는 세계 곳곳에서 신분 연령의 구별 없이 즐겨오는 놀이다. 대가지를 가늘게 잘라서 연살을 만들고 종이를 붙여 연을 만들고 살에 매어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날린다. 때로 다른 사람과 서로 연실을 부며 끊는 연싸움을 하기도 한다. 연을 날릴 때 송액영복 이란 글자를 써 붙이는데, 이것은 질병 사고 흉년 등 나쁜 액운은 멀리 사라지고 복이 오도록 비는 마음에서 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날리기가 널리 민중에게 보급된 것은 조선시대의 영조 때라고 한다. 영조왕은 연날리기를 즐겨 구경했고 또 장려하였다고 한다. 정월에 연날리기가 성행하게 된 이유는 사계절 중이 때가 연날리기에 가장 적당한 바람 인 북서풍 이 부는 계절이다.

 

 

팽이치기

 

겨울에 시내 아이들이 얼음판위에서 많이 하는 놀이로 도래기치기라고도 한다. 팽이에는 아래쪽은 뾰족하게 깎고 위는 평평하게 깎아 만든 보통 팽이와 위, 아래 모두 뾰족하게 깎아 만든 불팽이가 있다. 얼음판이나 땅바닥에 손으로 팽이를 돌린 다음 가는 막대기에 헝겊 또는 삼실을 달아 만든 팽이채로 쳐서 세게 돌리는데 여러 아이들이 저마다 팽이를 힘껏 친 후 일제히 팽이채를 거두고 가장 오래 가는 팽이를 장원으로 뽑는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추억의 놀이가 되었다.

 

자료정리 = 김종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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